청진
연의 아름다움은 바람도 얼레도 꽁수도 아니고 높은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나를 배고 엄마는 클래식만 들었다 지금도 소나타가 들리면 나의 왼손가락은 이슬을 털고 비둘기로 솟아오른다 나는 반쯤 자유 반쯤 미래 절반은 새엄마 내가 행복해야 당신의 흑발이 자라난다고 거대한 유칼립투스 아래에 누워 잘 지내고 있다고 전화를 건다 사랑은? 사랑은 옆에 잠들었어요 연인의 두툼한 뱃살에 귀를 얹은 채 행복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이곳이 눈부시다고 말한다 그때, 혼자 떨고 있었던 거지 병원 앞에서 내 이름을 불렀던 거지 이상해 배꼽 주변이 자꾸 가렵고 고압선을 보면 힘껏 당기고 싶고 꿈속에선 늙은 범이 돌담을 넘다가 늘어진 젖이 쓸려서 차게 울어요 연인은 깊은 하늘로 녹아들었고 엄마는 말없이 듣고만 있고 통화감은 철새처럼 높이 떠올라 곡물처럼 끊기는 목소리, 내가 이곳에서 새 삶을 사는 동안 엄마는 암을 숨기고 식당 일을 했고 나는 밝은 새소리로 이곳의 풍경을 노래하면서 남반구의 하늘에 대해 말했다
수육
늙은 엄마는 찜통 속에 삼겹살을 넣고 월계수 잎을 골고루 흩뿌려둔다 저녁이 오면 찜통을 열고 들여다본다 다 됐네 칼을 닦고 도마를 펼치고 김이 나는 고기를 조용히 쥔다 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은 뒤 씹어 삼킨다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 것, 입속에서 일곱 색이 번들거린다
환
1.
사랑은 볕 안에서 되살아난다 그래서 뿌리식물은 뱃속을 데우는 것이다 나는 달래 더덕 인삼 췌장을 캐며 머리칼을 우지직 뜯던 사람을 알고 캄캄한 CT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말없이 흙과 돌을 씹어 삼켰다 콧속에서 도라지 뿌리가 튀어나왔다
2.
흰 살 생선, 이런 건 잘
못 먹겠다
아침볕은 빈방까지 두루 밝히고
3.
잘 말린 대추의 표면엔 물결이 있다 저물녘에 손을 잡고 강에 뿌렸다 부드럽게 일그러지는 강의 사람들, 장례를 마치고 대문을 미는데 마당이 불탔다 돗자리 위에 지장을 빼곡히 찍어두었다
4.
가장 가는 손가락으로 고리를 걸고
가장 굵은 손가락으로 지문을 섞고
5.
늙은 사람의 손은 정말 효험이 있다 배가 돌고 장이 녹고 귓불이 퍼지고 이 힘으로 만두를 빚곤 하던 때
6.
대추차를 마실 땐 꾹꾹 씹어야 한다
그래야 눈귀코로 밝은 빛이 쏟아져나온다
7.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급하다고, 다짜고짜 가게에 쓸 재료를 부르기 시작했다 멸치 마늘 양파 홍합 갈치 순두부 갑자기 꽃을 하나 사달라 했다
8.
꽃을 사서 엄마 손에 쥐여주었다
9.
해바라기유를 잘못 알아들었다
10.
보고 싶다고 중얼대며 깨를 뿌린다 깨를 뿌리면 물질은 금세 음식이 된다 이 작은 게 가벼운 게 콕콕 박힌 게 으질으질 씹자 빛의 맛이 번지고
11.
브라질 친구와 나란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가 길에서 펑펑 울었다 왜 그래 이거 봐 너무 환하다 개나리야 나도 알아 개나리라는 말 그런데 이거 우리나라 국기 색이야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