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나는 분명히 반대했다. 왕손의 이름을 개똥이라고 짓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름이 거하면 인생이 이름에 잡아먹힌다. 그런데도 아내는 순우리말 이름을 고집했다. 1988년 자주민보 대신 ‘한겨레신문’이라는 제호를 지지했던 것처럼. 첫딸의 이름은 김보미나래. 웬만한 인생 살아서는 이름값 하기 힘든 이름이었다.
말이 느렸기에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심각하게 여기게 된 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나는 주말마다 딸에게 역사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서로의 발이 닿을 만큼 작은 소반에 앉아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전수하는 것, 그것이 내가 꿈꿔온 부녀상像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함께 책을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책에 얼굴 그림자가 드리우고 부녀는 가마가 닿을 듯 가깝다.
‘꿇다’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꿇다는 욕심이다. ‘기슭’도 양보한다. 그럼 ‘접시’는? 접시도 넘어가자. 그럼 ‘노랑’은? 노랑은 안 되는데……
딸은 역사는커녕 한글 받침도 금방 익히지 못했다. 받침이 쉬운 단어를 읽는 데 육 개월이 걸렸고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받아쓰기에서 받침을 노상 틀렸다. 당신은 ‘ㅔ’와 ‘ㅐ’를 합친 모음을 아는가. 나는 그 모음을 아는 부모와 모르는 부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딸은 지금껏 ‘ㅔ’도 아니고 ‘ㅐ’도 아닌 모음을 쓴다. 눈치를 살펴 냄‘새’로 쓸지 냄‘세’로 쓸지 간보기 위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야?” 물어도 딸은 웃기만 했다. 자작곡은 늘어만 갔고 나는 혹시 딸애가 작곡 영재가 아닐까, 그건 공부 머리랑은 또다른 거니까, 기대를 품었다. 노래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뜩하다. 나는 딸을 키우면서 무시로 아뜩함을 겪는다.
사진 기억력이 있진 않지만, 나는 ‘암기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도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약간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그런 종자가 아니다. 그런 종자. 절기를 외우기 위해 멜로디를 붙이는 종자, 연표를 외우기 위해 사건의 앞 자만을 따 괴상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종자, 스펠링이 긴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 단어에 섹슈얼한 비유를 포개는 종자, 그래야만 겨우, 외울 것들을 외울 수 있는 종자, 한마디로 머리가 나쁜 종자.
아내는 조용한 ADHD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여자애들은 수업시간에 돌아다니질 않아서 병인 줄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대. 깜찍한 얼굴로 수업시간에 딴 생각만 하는 거지.”
우리는 식탁에 앉아 마루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딸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딸은 너무 천진해 보였다. 더 어린 애들이나 보고 웃을 만화에 여전히 웃었다.
“어머님, 아버님. 나래는 멍때려서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는 게 아녜요. 설명을 못 알아들어서 멍때리는 거예요. 둘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하나는 치료가 되고 하나는 치료가 안 되니까요. 지능검사 한번 받아보시겠어요?”
센터를 나오면서 아내는 분통을 터뜨렸다.
“왜 남의 애 이름을 함부로 축약해?”
그러곤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형, 우리 어떡해?”
사실 징후는 곳곳에 있었다. 딸은 산수 문제를 풀 때마다 노골적으로 하품했다. 벌써 사춘기가 왔나,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슬픈 제스처. 문제를 못 푸는 것이 둔탁한 이해력 때문이 아니라 맹렬한 피로 탓이라고 자신을 속이기 위한 가짜 하품. 그러나 나는 경험상 안다. 풀 수 있는 문제는 풀 수 있고, 풀 수 없는 문제는 풀 수 없다. 그건 애정 결핍, 게으른 성정, 유년기의 상처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내가 의심스럽기는 했다. 아내와 나는 같은 대학원을 나왔다. 그러나 대학은 달랐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다.
“석형네 딸은 조기졸업하고 카이스트 갈 예정이라던데……”
언젠가 내가 운을 떼자 아내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능은 유전 아닌가?”
아내와 나는 공장에서 처음 만났다. 소위 말하는 ‘학출’이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석형은 ‘여공’과 결혼했다. 여공의 딸이 카이스트에 가다니…… 차마 이 말은 뱉지 않았는데 아내가 경멸하는 얼굴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
샘에게
샘!
어제 이 할아버지랑 놀이터에서 재미나게 놀았지요? 태어나 처음으로 모래알을 쥐어보곤 푸푸 침을 흘리며 웃던 우리 샘. 그 웃음을 보는데 할아버지 마음이 환해졌어요. 드디어 내게도 봄이 왔구나, 알았어요. 이 할아버지가 푸르른 청년이었을 때, 마음에 봄을 담는 건 죄였답니다. 언제나 겨울, 나를 용서 못한 날이 매일이었어요. 동갑내기 학생이 죽어가던 시간에 목마레코드에서 음반이나 고르고 있던 어느 볕 좋은 봄날이 이 할아버지가 아는 유일한 봄이었어요. 샘, 나에게 진짜 봄을 가르쳐주어 고마워요.
곱슬머리, 검은피부, 두툼한 입술.
나의 사랑하는 손자, 샘.
*
이 년 전, 보미나래의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 문을 오목교의 이자카야에서 만났다. 딸의 진학 상담을 위해서였다. 메뉴판에 ‘시가’라고 적힌 다금바리회와 데운 사케를 시켰다.
“나래는 명분 쪽으로 가야겠네.”
딸에 대해 얼마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금세 진단을 내렸다.
“명분?”
“몰라? 대가리파, 노력파, 명분파?”
대가리와 노력에 대해서는 아예 감이 없진 않았는데 명분은 감감했다. 딸의 성적을 듣고 난 뒤 표정 수습이 필요할 만큼 부진했다.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니어서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곧 잘 할 텐데’하는 정신 승리마저 못하게 했다. 원천봉쇄의 부진함이었다. 조용하고, 꾸준하고, 종종 뜨개질감을 들고 종점에서부터 종점까지 버스를 타는 것 외엔 별다른 일탈도 않는 착한 딸. 그렇게 반항의 맛마저 없는.
“초롱은 셋 중 뭔데?”
문은 ‘알면서 뭘 물어, 상처받고 싶어 그래?’ 하는 투로 말했다.
“셋 다 아니지. 우리 초롱인 레블rebel파지. 말을 마라. 고거 때문에 내 속이 숯덩이다.”
문의 딸인 초롱과 보미나래는 동갑이었다. 마누라들이 임신했을 때, 문과 나는 백민투, 조민중, 이애국 같은 이름은 짓지 말자고 했다. 최악도 감당하는 아비가 되자고 했다. 자식이 보수 우익의 젊은 기수가 되건 서울역에서 기타 치며 포교 활동을 하는 종교인이 되건 내 구미에 맞게 조련해 키우지 않겠다는 급진적인 양육관이었다.
우리의 딸들은 판이하게 컸다. 초롱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삭발하고 사르트르 따위를 읽다가 최연소로 등단해 검정고시를 거쳐 국공립 예술대학에 들어갔다. 언제나 문은 서글프게 말했다.
“우리 딸은 중학교 중퇴자야.”
결코 자신의 딸이 신문에 날 만큼 유명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전의 낙차를 벌리려는 개수작. 그것도 모르고 ‘문의 딸이 초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우리 애가 낫네’ 하는 사람은 훗날 창자가 잘린 양 격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그랬듯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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