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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향해 올린 글
영조가 즉위한 해인 1725년 5월 9일 《영조실록》에 우리의 눈을 끄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영부사 이이명의 처 김씨 부인이 상언上言을 올렸다는 것이다. 김씨 부인은 그 유명한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딸이다. 아버지의 글 솜씨를 이어받은 것인지 김씨 부인이 올린 상언은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관인이나 유생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장면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 상언을 올렸다니 왠지 낯설다. 상언은 무엇이고 김씨 부인은 왜, 아니 어떻게 상언을 올렸을까?
김씨 부인의 예에서 보듯 조선 사회는 백성들이 자기 사정을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관청에 올린 진정서인 소지所志나 임금에게 올린 상언·격쟁擊錚이 있었다. 상언은 백성들이 글로 임금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꽹과리를 친다는 뜻의 격쟁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였다.
상언은 상소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용하는 문자도 다르고 쓸 수 있는 자격도 달랐다. 상소는 아무나 쓸 수 없었다. 상소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관인이나 유생, 사림들에 국한되었고, 한문으로 써야 했다. 하지만 상언은 관원으로부터 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쓸 수 있었고 이두를 사용했다. 상언은 격쟁이나 소지 등과 아울러 억울한 일을 당해 관에 호소하는 소원訴寃 제도의 일부를 이루었다.
이는 법적으로도 보장된 제도였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형전刑典〉에는 소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려는 사람은 수도에서는 주관하는 관리에게 제기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제기한다. 그래도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사헌부에 제기하며 또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신문고를 친다.’ 그리고 ‘상언을 올리면 당직 관리가 사헌부의 반려 사유[退狀]를 살펴본 뒤에 받아서 임금에게 보고한다. 만일 의금부나 사헌부에서 심리할 만한 것이면 애초에 반려 사유를 상고하지 않는다. 또 임금의 비준을 받고 내려 보내면 5일 이내에 회답 보고를 올려야 한다. 만일 기한을 넘기면 회답 보고를 즉시 올리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써서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이 있었지만 소원은 민의를 임금에게 전하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더욱 직접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임금의 가마 앞에서 상언하는 가전상언駕前上言이나, 임금이 거동할 때 징이나 꽹과리를 치고 사연을 직접 호소하는 ‘위외격쟁衛外擊錚’ 같은 소원 방식이 16세기 중엽에 등장했다. 그렇다고 무엇이나 소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원의 범주는 ‘형벌로 죽는 일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刑戮及身’, ‘부자관계를 밝히는 일父子分揀’, ‘적처와 첩을 가리키는 일嫡妾分揀’, ‘양인과 천인을 가리는 일良賤分揀’에 국한되었다.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소원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자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위해서子孫爲父母’, ‘부인이 남편을 위해서妻爲夫’, ‘동생이 형을 위해서弟爲兄’, ‘종이 주인을 위해서奴爲主’ 소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자신의 억울함에 한해서만 소원할 수 있도록 한 《경국대전》의 규정과는 달리, 아들이나 부인, 동생 등 강상綱常 관계에 있는 이들도 대리로 나서서 신원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정조시대에 오면 상언과 격쟁이 양적으로 늘어났다. 정조는 상언과 격쟁을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 있는 통로로 여겼고, 따라서 이를 통제하기보다는 ‘위외격쟁’과 ‘가전상언’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럼 여성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위에서 이미 부인이 남편을 위해서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여성도 소원할 수 있는 주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국대전》에는 여성의 소원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지는 않았다. 여성의 소원이 금지되어서가 아니라 남녀 누구에게나 소원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여성이 올린 상언이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수록되어 있으며, 《일성록》과 고문서 등에도 여성이 올린 상언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록에 실린 여성의 상언·격쟁 기사를 보면 왕족 여성으로부터 양반 여성, 평민 여성, 기녀, 여종, 궁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상언을 올리고 있다. 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순종 4까지의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을 대상으로 정조 대 국왕에게 상언·격쟁한 사례들을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총 4,427건신분 직역이 확인되는 숫자는 3,888건의 상언·격쟁들 중에는 여성들이 제기한 상언·격쟁이 405건이나 포함되어 있다. 정조 재위 기간인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약 25년 동안 405건이면 한 해에 16건 정도의 청원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는 전체 상언·격쟁의 10.4퍼센트 정도이며 이 중 평민층 부녀자가 올린 것이 사족 부녀자가 올린 것의 3배 정도가 된다. 그 외 현재 수집, 정리되어 있는 고문서들 가운데서도 여성들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여성들의 소원 활동이 활발했음을 뜻한다.
상언에 대한 자료를 보면 상언과 격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의 관심이 여성의 글쓰기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여성이 올린 상언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여성이 상언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妻爲夫 할 때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올린 상언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올린 경우도 많고 더러 딸로서 한 경우도 발견된다. 상언의 내용은 재산, 가족, 후계, 산송과 같은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신분에 따라 상언하는 내용도 달라서 양반 여성들은 주로 후계나 산송 문제로 상언을 했고 하층 여성들의 세금이나 송사 문제로 상언을 했다. 양반 여성들이 올린 상언 가운데는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로 죽은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올린 것들도 많다. 이 상언은 강한 당파성을 띠는 정치적 발언을 포함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도 상언을 보면 많은 의문이 생긴다. 집 밖을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양반 여성들은 어떻게 상언을 올렸을까? 상언을 올리면 다 받아 주었을까? 상대적으로 글을 쓰는 비율이 낮았던 것으로 보이는 하층 여성의 상언은 본인이 직접 썼을까? 본래 상언은 한문으로 써서 올리게 되어 있는데 여성들이 직접 한문을 썼을까, 아니면 누군가 대리로 써 주었을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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