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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심장
오로지 그것에 대해 말함으로써만 우리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1968
맑고 쌀쌀한 어느 가을날, 햇빛이 마지막 나뭇잎들을 비추는 가운데 공원에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만 세 살 정도 되어 보였고 세어보니 모두 여덟 명이었다. 눈에 잘 띄는 초록색의 펑퍼짐한 조끼를 입은 아이들을 교사 두 명이 인솔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둘씩 손을 잡고 촘촘히 줄지어 걸어갔다. 더 자세히 보니 아이들은 옆, 그리고 앞뒤 아이들과 끈으로 손목을 묶고 있었다. 한 명이 넘어지면 와르르 넘어질 수 있으니, 인솔 교사는 아이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이동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맨 앞의 아이는 이 표지판에서 동그라미, 저 표지판에서 네모를 발견해 신나게 외치며 도형 알아보는 능력을 뽐냈다. 아이들은 좁게 불어 걸어가느라 떠밀리고 부딪히면서 친구 발에 걸려 넘어질까 봐 긴장한 채 총총히 이동했다.
우리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은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한다. 그 또래 아이들은 돌아다니다가 멈췄다가 뒤로 갔다가 뱅뱅 돌았다가 하면서 탐험하고 실험해보고 싶어 한다. 내가 본 광경은 가장 군대식의 (말 그대로 오와 열을 맞춘) 아동 돌봄 형태일 것이다. 놀이의 본질인 자유롭고 즉흥적이고 자발적인 모습이라기보다 수감 상태와 더 비슷해 보였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있는 것일까? 어쩌다가 아이들의 손목을 서로서로 묶어두는 것이, 혹은 어른 한 명이 유아 네 명을 맡는 것이 용인 가능한 돌봄의 형태가 되었을까?
응급 상황이 발생해 다른 사람의 돌봄에 갑자기 의존해야 할 때 우리는 돌봄의 질을 체감하게 된다. 불안한 순간에 응급구조사의 부드러운 유머나 간호사의 세심한 보살핌, 혹은 의사의 친절함은 매우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다. 반면 그러한 유머나 세심함이나 친절함이 없을 때, 의료진이 과다한 업무에 지쳤거나 바빠서 참을성이 없을 때, 아니면 아예 의료진을 만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돌봄의 구조가 너덜너덜하게 해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돌봄은 우리 삶의 아주 많은 면을 떠받치고 있어서 그것이 발현되는 맥락과 양태도 굉장히 다양하기 때문에, 아동 돌봄, 환자 돌봄, 노인 돌봄 등의 공통점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공통점에 주목하면 돌봄이 인간의 번영에 해로운, 그러면서도 잘 인식하기 어려운 무언가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로서로 손목을 묶고 촘촘히 붙어서 공원을 걸어가던 아이들의 모습 만큼이나 불편하고 서늘한 광경을 우리집 근처 버스정류장 가는 길에 있는 요양원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앞을 천 번은 지나갔을 텐데도 요양원 마당에 사람이 있는 것도, 창문이 열려 있거나 햇빛이 들어오도록 두꺼운 망사 커튼이 젖혀져 있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이 요양원은 영국 전역에 있는 수많은 요양원과 마찬가지로 분리된 세계다. 이 비밀스럽고 내향적인 세계에서 노인들은 그저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린다.
돌봄의 위기는 극적인 사회변화에 직면한 문화의 위기이자 정치의 위기이며 윤리의 위기다. 오래도록 돌봄의 가치와 중요성을 폄하해온 뿌리 깊은 편견이 21세기의 현실과 충돌하고 있다. 돌봄의 위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는 돌봄에 접근할 수 없거나 접근성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돌봄의 질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이다. 나는 가정, 병원, 일반의 진료소, 돌봄 관련 단체, 요양원, 호스피스 병동 등을 방문해 사람들을 만났고, 업무 중간중간 짬이 날 때, 또는 직원 휴게실이나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면서 그들이 해준 이야기에서 공통된 주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우선 몇 가지 두드러진 요인이 결합해 돌봄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잘 알려진 원인 하나는 인구학적 변화다. 2001년에서 2015년까지 85세 이상 인구는 38퍼센트나 증가했고, 2016년에서 2041년 사이 이 인구는 두 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길어진 수명 중 평균적으로 마지막 6년은 매우 취약해진 신체를 가지고 여러 종류의 약을 상시 복용하면서, 또한 복잡한 진료와 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보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대개는 먹고, 씻고, 용변 보는 것을 돕는 전통적인 종류의 돌봄도 필요하다. 2018년 의학 학술지 《랜싯The Lancet》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2035년까지 85세 이상 인구 중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 두 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한 우리 사회가 제도, 정책, 재원 등의 면에서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한 돌봄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노인을 누가 돌보는가’의 문제는 두 가지의 강력한 사회적 기대 사이에 끼어 있다. 한편으로는 가정이 이 필요를 충족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찍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야심을 표방한 바 있는 국가가 복지제도를 통해 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사실 평균적인 가정이나 국가 모두 이런 종류의 돌봄을 수행할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없다. 국가가 제공하는 연금이 처음으로 법제화된 1908년에 기대수명은 남성 47세, 여성 50세였다. 19세기 소설에는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사랑스러운 딸의 낭만적인 이미지가 종종 등장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었다. 많은 여성이 출산 도중 숨졌기 때문이다. 옛 조사 자료들을 보면, 영국에서 한 가구에 위아래로 3대 이상이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방 한편에 계시는 할머니’는 신화다. 많은 가정이 노인을 집에서 부양할 수 없었거나 부양하지 않았고, 원래는 게으른 부랑자를 수용할 목적으로 지어졌던 19세기의 참혹한 구빈원이 비극적이게도 노인들로 가득 찼다. 게다가 복지제도가 생긴 뒤에도 노인에 대한 돌봄이 곧장 개선되지는 않았다. 일례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신질환이 있는 노인을 과밀하게 수용한 이른바 ‘뒷병동back wards’에서 환자들을 가혹하게 다룬 실태가 폭로되어 대중의 공분이 일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회적 돌봄 시스템의 부족으로] 노인들이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는 사이클에 끼이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또다시 돌봄의 수요와 공급 간 불일치가 일으키는 위험에 처해 있다.
노인 돌봄은 가정에 막대한 부담을 주는데, 그 부담의 상당 부분은 본인 역시 노인인 배우자가 진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65세 이상 인구 중 130만 명이 돌봄제공자이며, 이 숫자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아내가 남편을 돌보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75~84세에서는 돌봄제공자의 남녀 비중이 거의 비슷해지고 85세 이상에서는 돌봄제공자의 41퍼센트가 여성, 59퍼센트가 남성으로, 남성이 더 많아진다. 배우자 다음으로 돌봄제공자 대열에 서 있는 사람은 노인인 부모를 돌보는 50, 60대 자녀로, 이들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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