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 인생의 삼중주, 사람 배움 상상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서로 만나는 장소다.”
- 프레데릭 뷔히너
(중략)
시민교육과 방송은 통한다
―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새로운 일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옛 동료가 술자리에서 말했다. “MBC 〈피디수첩〉에서 방송구성작가로 몇 달 일했는데 나는 정말 아니더라고요. 그만두고 나왔어요.” 방송구성작가가 뭐지? 생소했다. 그런데 하고 싶었다. 직감적으로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른다섯 나이에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방송국 관계자들을 몇 사람 만나봤지만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시민문화운동단체에서 주최한 ‘다큐멘터리 특강’을 들었다. 그날 강사였던 김옥영 방송작가의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다큐멘터리의 핵심은 각성과 변화다.” 다큐멘터리가 내가 추구하는 교육의 핵심과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방송일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때가 1994년 2월. 김영삼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KBS의 간판 시사다큐멘터리 〈추적60분〉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팀에 이력서와 아이템 기획서를 들고 찾아가 면접을 봤다. 다음 날 연락이 왔다. “내일부터 나올 수 있나요? 일단 한 편 하고 봅시다.”
그렇게 나는 방송일을 시작했다. 그 후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신한국기행〉, 〈특종 비디오저널〉, 〈역사스페셜〉, 〈KBS 스페셜〉, 〈인물현대사〉, 〈한국사회를 말한다〉, 〈시사투나잇〉 등을 집필했다.
나는 방송작가 일을 참 좋아했다. 비록 근로계약서도 쓰지 못해 비정규직 노동자도 못 되는 프리랜서 신분이었지만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과 세상이 신선했다. 누가 뭐라 하든 나는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이 분명했다. ‘방송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깊은 시선과 애정, 그리고 질문하는 능력이다. 방송작가는 저널리스트다.’
저널리스트로서 방송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템 기획부터 촬영구성안, 편집구성안, 최종 원고까지 모든 단계에 관통하는 관점과 시선이다. 방송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 있는가, 그것에 촉각을 세워 고민하고 구성하고 표현해야 하는 일. 이것은 내가 시민교육기획자의 길을 가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또 하나 중요하게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호기심과 질문하는 능력. 방송은 시청자를 대신해 질문하는 일이다. 왜 그 시대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교육을 새로 기획할 때도 강의시간에 진행을 할 때도 기획자에겐 질문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참여자들이 질문의 힘을 더 키워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질문하는 능력은 사랑하는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나’에서 출발하지만 외부로 시선이 열려 있어야 내가 뭘 모르는지 알게 되고, 더 알고 싶어지고, 내가 느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진다. 나에게 방송작가와 시민교육기획자의 일은 질문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 언젠가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서 발견했던 글귀다. 지금은 교육과 방송뿐 아니라 다양한 자신의 직업 경험을 토대로 시민들 누구나 기자, 편집자, 작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당연히 시민교육기획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랑하는 힘, 질문하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노동대학
― 진정한 공부는 머리, 가슴, 발로의 여행
교육기획자로서 가장 뿌듯했던 일을 꼽으라면, 그중 하나가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노동대학을 처음 기획해 5년 동안 키워왔던 경험이다. 지금도 기억한다. 총 20회 수업의 노동대학 1기를 마치고 첫 수료식을 하던 날. 신영복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수료증을 전달했다. 나는 맨 앞줄에서 수료식 진행을 도우며 흐르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해냈구나.”
가슴이 벅찼다. 과연 될까? 걱정도 많았지만 여러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낸 장기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커튼콜을 하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프리랜서 방송작가였던 나는 1999년부터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일했다. 일종의 ‘투잡’이었다. 교사들을 위한 ‘교사아카데미’, 일반 시민들을 위한 ‘고전읽기반’을 기획했다. 동시에 가장 공을 들였던 것은 ‘노동대학’이었다. 1년에 두 학기, 16~20회의 긴 시간. 그때 사회교육원장이던 신영복 선생님이 수료식에서 말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진정한 공부는 발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 신영복 선생님은 ‘문사철 시서화文史哲 詩書畵’가 통합되는 교육, 시민과 노동자가 이른바 ‘근로 인테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근래 10여 년만큼 인문학 강의가 유행(?)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더불어 내가 깊이 고민했던 것이 있었다.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모두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진정 즐겁고 행복해야 계속 운동을 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가 통합되는 자유로운 시민, 사회와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해내는 시민. 이러한 시민들의 성장과 변화에 교육이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노동대학을 만들고 5년. 그 후 2004년 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을 떠났지만, 지금까지 노동대학은 안정적인 노동자교육의 대표 모델로 성장해왔다.
모든 시민은 교사, 예술가, 정치가
2008년 방송을 접고 나는 참여연대 부설 교육기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시민교육기획자로서 일을 시작했다. 2020년 말 정년퇴직할 때까지 정말 즐겁게 일했다. 12년 동안 이 일을 하며 내가 중요하게 품었던 핵심적인 생각을 말해본다.
- 민주주의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힘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성장한다. 그 시민들의 힘과 삶의 변화를 돕는 시민교육이 필요하다.
- 모든 시민은 교사, 예술가, 정치가다
모든 시민은 그 삶의 스토리와 경험, 존재 자체를 통해 서로에게 배운다. 서로는 서로에게 ‘교사’다. 모든 시민은 예술적인 삶을 향유하고 표현할 욕구를 가지고 있다. 전문예술가만 예술가가 아니다. 모든 시민은 ‘예술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모든 시민은 정치의 주체로 자신의 삶과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불의에 저항한다. 모든 시민은 ‘정치가’다.
- 시민교육, 삶의 물음에 대답하라
사랑하고 분노하고 갈등하고 슬퍼하는 감정의 문제도 시민교육의 중요한 주제다. 자신과 사회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집이란 우리에게 무엇인지, 돈이란 무엇인지 시민 일상의 사안에 대해 성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 지성, 감성, 영성의 통합교육
시민교육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처한 삶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지성’,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찰하는 ‘영성’의 통합이 필요하다. 지성, 감성, 영성이 통합되었을 때, 우리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시민, 지치지 않고 저항하는 시민, 연대하고 관용하는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통합성. 이것은 교육의 내용, 형식, 방법 모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 이러한 시민교육을 기획하는 당신은 교육자, 교사이며 나아가 교육연출가, 예술가다. 그 정체성이 중요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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