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한번 사슴이 되었던 적 있다
검은 개 한마리 침을 흘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잡아먹힌 부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길가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매질은 골목에서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신다
애인은 너무 오래 말라 있었다
나는 속옷을 뒤집어서 입었고
그게 여름이었다
이름이 미주 아니면 희주였다
흐린 날 강가에 놀러 간 적도 있다
저녁이 되어 모닥불을 피웠는데
내 옷만 마르지 않았다
내가 물에 빠진 걸 아무도 몰랐다
물 대신 피를 똑똑 흘리며
뿔과 심장을 잘 보이는
남향에다 두었다
비명은 한 손에 쥐고
내가 부활한 사실은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라이브
바다로 추락해 실종
특별연장근로 인정 검토
유력 용의자는 둘째 아들
지구촌 기상이변 속출
정기국회 파행
극단적 선택 추정
어두운 소문들과 그 내밀한 까닭이
앉아 있는 이의 입에서 시작되고
벌새 한 마리를 보는 일에도
만듦새와 만드신 이를 생각하는
내 어머니는 어느새 옆으로 와서
아이고 쯧쯧, 혀를 거듭 차며
그 모두를 기쁘고 반갑게
속으로 맞이하신다
사람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한 노래와 함께
들어 올림을 받는 일
지구에서 알고 지낸
깊고 넓은 시름들이 전부
기담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그 일이 예고되었으니
기다리고 계셨다
버리고 간 피아노에 우리가 있는데
먼 빛을 세놓은 눈빛을 끄면
자기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묻고 싶은 표정으로 가끔
그러고는 이거 뚜껑 좀 열어라
마늘장아찌 담아놓은 병을 건네시고
연착
갑자기 내리는 세찬 비였습니다
안 쓰는 대합실에 잠깐을 머무르려
사람들이 적잖이 모여들었고
의자도 다 차서 맨바닥에 앉습니다
철길 따라서 먼 빛으로부터
승강장에 들어오는 열차를 기다리는
다행히도 갈 곳 있는 승객의 처지로
내 이름과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내리는 비가 오래도록 많아서
눕혀진 김에 드러누운 사람들은
서로가 처음이라 이럴 바에 차라리
이름하고 성을 좀 나눠보자고
나도 따라 일러준 그 이름은 사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름이었지만
이 기회에 살아보는 내세는 다정했고
춤과 노래를 쉬는 때마다 사람들이 태어났습니다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다 죽은 나는
내 아들의 딸로 다시 대합실에 나서
떠나지는 노래마다 비옷을 입혀가며
모질고 튼튼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말보다 빗소리를 더 먼저 배우는
기다리는 이곳에서 열달 순산으로
승차권을 끊게 된 갓난이 받는 일을
손수 하게 되는 가끔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가끔가다 어떤 해산어미들은
제 애 이름 하나 지어주기를 나한테 간청하고
그때마다 나는 이름만이라도 화창하게 지어주는데
그게 다 내가 꿈에서 자주 불리던 것들이었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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