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래요
― 어머니께
두 번의 변호사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시험 보기 전 이미 청산에 살어리랏다 마음 비우고서도 이렇게 슬픕니다. 응원해주셨는데 이겨내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배고플 때, 졸릴 때, 아플 때, 심지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도, 꾹 참고 한 자라도 더 보면 성적은 올라가죠. 그렇게 입시마다 잘해왔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어요. ‘어차피 시골에 내려가려는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늦은 물음이 마음속에서 요란히 굴러다녔습니다. ‘당장 시골에서 살겠다’ 마음을 먹으니, 더는 변호사라는 직함에 연연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어머니, 저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래요.
도시라는 좁은 곳에 잘 모르는 사람끼리 모여 살다 보니, 겉으로 보이는 꼬리표에 눈이 갔어요. 시골에 살 마음은 항상 있었는데, 도시에서 이룰 수 있을 만큼 다 이룬 뒤의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선 많은 것을 갖고자 했어요. 가장 익숙한 건 수험이었습니다. 시험이 하나 끝날 때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끼곤 금세 또 다른 모양의 수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도시 생활은 수험 생활의 연속이더군요. 고통스러웠지만 매 시험 때마다 ‘이 시험만 끝나면!’ 하며 스스로를 다독여왔습니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아요. 고난 속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 좋은 집을 얻어도 그제야 시작입니다. 좋은 배우자, 훌륭한 아이, 다시 그 아이의 성적, 학교, 직장… 이렇게 시험의 고난은 대를 이어가죠. 이 연속되는 시험 속에 ‘언제든 한 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구나’ 싶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니 아내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죠, 우리 있든 없든 시골에 가 살자고.
로스쿨에 가기 전에도 진지하게 말씀드린 적 있죠. 시골에서 살겠다고. 그때 어머니는 젊은이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 뒤에 시골로 와도 늦지 않다며 말리셨습니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기에 수긍했어요. 이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젊은이로서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 여전합니다. YOLOYou Only Live Once. 한 번뿐인 삶이니 대차게 살고 싶은데, 도시에서의 삶은 너무 비싸요. 하고 싶은 일을 꾸리기엔 위험 부담이 큽니다. 괴산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어요. 변호사라는 직함이 있으면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갔겠지만 달라질 건 없습니다.
(중략)
귀농이라니 한숨이 터진다
― 작은 아이에게
너는 도시에서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내려오고 싶다니, 한숨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엄마의 시골 생활은 갑작스러웠어. 초기 뇌경색이던 할머니가 뭐든 의심하시기 시작했다. 부탁을 받고 도와주시던 교회 권사님이 자꾸 당신 옷을 훔쳐 간다면서 집을 비울 수 없다시더구나. 한참이나 권사님과 이야기 나누면서 알게 되었어. 치매의 증상 중 하나가 의심이라는 걸 말야. 그렇게 서둘러 괴산에 집을 지었다. 물론 너희 아버지의 불타는 귀농 의지도 한몫했지만.
그 첫해, 생각지도 않게 절임 배추 일을 거들게 되었단다. 꽃을 좋아하던 내가 어느 집 담벼락의 하얀 꽃나무를 한 삽 얻으려고 갔다가 도리어 절임 배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받았던 거야. 마을에는 연세 드신 노인들만 늘어가니, 그 집 형님은 팔팔하게 일할 수 있는 젊은(?) 귀농인이 무척이나 반가우셨던 모양이다. 절임 배추 작업은 단순했다. 단순하지만 고되었지. 밭에서 배추를 따고, 반으로 가르고, 소금에 절이고, 건져서 씻는 일. 팔뚝은 물론 앞자락까지 흠뻑 젖기가 일쑤요, 소금은 머리 속에까지 뿌려져 늘 버석거렸다. 그렇게 절인 배추를 건져내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단순한 공정도 어느 하나 쉬운 건 없었어. 저녁마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밤새 앓아도 빠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단다. 도시에서 온 사람은 일을 못한다는 인식을 주고 싶지 않았어. 아빠도 엄마도 그렇게 꼬박 보름, 끙끙 앓으며 배추를 절였다.
그런 인연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싶어. 배추 형님 댁 트랙터로 밭고랑 작업을 부탁할 수 있었고, 묘목을 심을 때 일손도 함께 보태주셨다. 그뿐일까. 마을에서 좀 외진 우리 집엔 마을 방송이 들리지 않는다. ‘초상이 났다’, ‘퇴비가 도착했다’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대소사 챙겨야 하는 마을 일은 배추 형님이 전화로 알려주시더라. 여전히 품앗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실감했어. 농사일의 고단함을 몸이 저리도록 아니깐, 다른 사람의 노동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도시서 살다가 홀연히, 그야말로 준비 없이 시골살이는 시작됐다. 아로니아를 심기로 한 것도 순간이었다. 너희 아빠가 몸에도 좋고, 기르기도 수확도 쉽다며 덜컥 결정했지. 딴에는 고민, 고민했더라도 엄마에게는 통보여서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구나. 아로니아 나무는 잘 자랐다. 순이 나고 돌아서면 훌쩍 컸지. 첫 수확 때까지 밭에 사는 일이 즐거웠다. 수확을 위해 뜨거운 8월 한 달을 꼬박 매달려야 했다. 붉게 올라오는 햇살을 보며 새벽부터 밭에서 일했다. 잘 익은 열매를 골라 따야 하는데, 새벽 햇살이나 저녁노을 질 무렵에는 열매 색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수확은 한없이 더뎠고, 어깨, 팔뚝, 목 가리지 않고 저리고 아팠어. 쐐기벌레는 또 왜 그리 많던지. 점심을 먹고 나서 하는 작업은 더더욱 힘에 부쳤다. 그냥 내려놓고 씻고 쉬고 싶지만, 그러면 내일 할 일이 늘어날 뿐이야.
정작 어려운 일은 수확 다음이다. 때마침 홈쇼핑을 비롯한 방송가에서 아로니아에 주목했다. 2~3년은 판매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었어. 풍작이기도 해서 열심히 고민하며 아로니아로 이것저것 만들어봤다. 특허도 신청해가면서 최선을 다했어. 열심히 만든 잼이니 와인이니 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찾아주니 신났었지.
그러나 대가는 성에 차지 않았어. 허리가 끊어져라 일을 했지만 수중에 남는 게 없었다. 농촌 현실에서 수고한 대가를 충족시키기란 요원하단다. 특히나 소규모 농가에서 흡족한 대가란 꿈 같은 일이라는 생각, 엄마만의 것은 아닐 거야. 패기 넘치게 시골로 온 사람들도 몇 년 못 버티고 떠나간단다. 수확물 판매는 해를 거듭할수록 어려워졌다. 매일같이 ‘아로니아, 아로니아’ 떠들던 홈쇼핑의 관심이 떠나간 뒤로는 더 혹독했어. 가공 공장 신축에 수천만 원 투자금도 퍼부었는데 걱정은 생각보다 깊고 아프다. 텅텅 빈 통장을 자조적으로 말하는 ‘텅장’은 젊은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텅 빈 통장 잔고를 보는, 열심히 일한 농부의 마음 역시 심하게 허탈하단다. 코로나로 상황은 더 어려웠다. 괴산의 농부들이 모여 한 달에 두 번씩 열던 직거래 장터를 1년 반 꼬박 열지 못했다. 수확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또 많은 대로 걱정이야. 내년은 또 어떻게 될지. 그렇게 견뎌온 10년이다.
동네 할머니께서 그러시더구나. “이 집은 풀도 키워?” 그래도 제초제를 쓰지 않는다. 유기농을 하겠다는 것도 욕심인지 밭엔 풀이 무성하다. 봄, 여름, 가을 풀과 실랑이해도 풀이 늘 이겨. 작물에도 유행이 있고, 규모가 되는 농가들은 돈 되는 작물을 좇아 심기도 한단다. 곁에서 보면 부러워. 농사로도 부자가 될 수 있구나. 그렇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는 소규모 농가는 많이 서글프지. 애쓴 만큼 돈도 되면 좋겠다는 속물적 마음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한숨이 터진다. 너를 말릴 수 없는 것 또한 잘 알아.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수업이 끝나자마자 땀을 흠뻑 흘리며 단숨에 집까지 달려와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아이. 점심을 다 먹고 나면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하니까 꾸역꾸역 밥을 두 그릇씩 먹던 아이. 하고 싶은 건 기어이 해야 하는, 하기 싫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 너는 그런 아이지.
그럼에도 어서 오라는 말을 못 하는 10년 차 농부다. 선뜻 반기지 못하는 엄마 마음을 알겠니. 든든한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서 오면 어떨까 싶은데. 그래도 그간 해온 법 공부가 아쉽지 않겠니. 학교 다닐 때는 성적도 잘 받아 왔잖아. 아직 늦지 않았으니 학원에라도 의지해보면 어떨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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