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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으로
1845년헌종憲宗 11년 8월 31일 상해上海의 한 선착장. 물결을 따라 흔들리는 라파엘Raphael호에 오르는 김대건 신부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작은 배가 다시 무사히 황해를 건널 수 있을까. 마포나루에 도착하면 관헌들의 눈을 피해 무탈하게 상륙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십상인 위험한 길이지만 그래도 조선 천주교를 위해 가야만 하는 길이 아닌가….
라파엘호는 큰 바다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배가 아니었다. 길이 25자7.5m에 불과한 작은 황포돛배였다. 강화도나 연평도 쪽으로 나아가 조기를 잡기 위해 만든 배였지만, 더 큰 배를 구할 길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뱃사공을 구할 때 물길잡이 역할을 할 사공 외에 배를 수리할 소목공小木工 한 명과 배 안에 물이 차면 물을 퍼낼 힘센 농민 출신 선원 두 명을 구해 함께 타고 왔다.
결국 황포돛배는 황해를 건너올 때 거센 풍랑에 돛이 부러지고 갑판도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파도가 높아 수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표류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상해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양자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오송吳淞항에 도착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가기 위해 상해로 온 것이었다.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로 가는 일행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보름 전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조선교구당시 조선대목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éol, 1808~1853 주교, 얼마 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다블뤼Daveluy, 1818~1866, 조선 이름 안돈이安敦伊 신부 등 세 명의 사제와 일곱 명의 조선인 평신도 대표 그리고 교우 한 명을 포함한 네 명의 뱃사람이었다. 평신도 대표들은 이번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조선에서 건너온 이들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세 명의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6년 동안 조선에는 사제가 없었다. 천주교에서 사제가 없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미사를 드릴 수 없어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페레올 주교는 2년 전에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되자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미사를 드리며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과 김대건 당시 부제副祭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일을 서둘렀다. 그러나 의주 관문의 검문이 삼엄해 프랑스인인 페레올 주교가 통과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페레올 주교는 8개월 전인 지난 1월 1일, 김대건 부제만을 한양으로 보내면서 바닷길을 개척하라는 임무를 맡긴 후 자신은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가서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는 4월 30일 마포포구를 출발해 황해를 건너 5월 28일 상해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오송항에 도착했다. 그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오송항에 와 김대건 부제와 조선인 교우들을 반갑게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수리 중인 황포돛배를 보며 이렇게 조그만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천주의 안배按排’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2주 전인 8월 17일, 페레올 주교는 상해 연안에 있는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김대건 부제의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한 명의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조선을 향한 뱃길에 함께 오르게 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오송항에서 수리가 끝난 황포돛배를 타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조선에서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있는 상해로 건너가 출항 준비를 마쳤음을 알렸다. 배에 오른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를 선장으로 임명했다. 또 이 작은 황포돛배에 여행자의 수호천사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호’라 이름 붙이고, 배가 무사히 황해를 건너 조선에 도착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축복을 청하는 기도를 했다.
라파엘호는 닻을 올렸다. 그러나 포구를 벗어나자마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퍼붓더니 세찬 맞바람까지 불어닥쳐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9월경에는 상해 앞바다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중국인들의 말처럼, 8월 31일부터 거의 매일 비가 내리더니 바람이 거세지면서 기온이 떨어져 내리던 비가 우박으로 바뀌곤 했다. 바다는 무섭고 거칠었다. 그래도 김대건 신부는 날씨가 개는 날이면 조선으로 가기 위해 닻을 올렸지만 번번이 포구로 되돌아오기를 세 번이나 거듭했다. 김대건 신부는 라파엘호를 제물포와 직선거리로 가까운 산동山東반도 쪽으로 끌고 갈 대형 중국 선박을 찾았다. 항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항해 거리를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선박이 굵은 밧줄로 라파엘호를 연결해 산동반도까지 예인해주면 그곳에서 한강 입구로 향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프랑스 선교사 페브르Jean-Faivre, 1803~1864 신부를 태우고 산동으로 가는 중국인 교우 선장이 라파엘호를 끌어주겠노라 했다. 그러나 중국인 선장은 하루 이틀에 그칠 비가 아니니 부근에서 가장 안전한 양자강 하류 어귀에 있는 숭명도崇明島 포구로 가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라파엘호는 중국 배를 따라 숭명도 포구로 이동하여 이미 그곳에 정박해 있던 100여 척의 배들과 함께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숭명도에서 기다린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9일, 김대건 신부는 문득 새벽잠에서 깨었다. 아직 어스름이 깔린 갑판 위로 오른 그는 먼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일주일 넘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던 바다가 오늘은 잔잔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출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대건 신부는 날이 밝자 중국 배의 선장을 만나 상의하고 페레올 주교에게 출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중국 대형 선박에 굵은 밧줄로 연결된 라파엘호는 미끄러지듯 숭명도 포구를 떠나 산동반도로 향했다. 양자강을 벗어나자 선원들은 돛을 올렸다. 라파엘호의 황포돛은 순풍을 받아 안고 한껏 부풀어 올랐다. 김대건 신부의 눈에 산동반도 쪽으로 향하는 중국 배들이 거대한 선단처럼 무리 지어 항해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 드디어 조선으로 가는 건가….’
김대건 신부는 그제야 라파엘호가 조선을 향해 가고 있음을 실감하면서 벅찬 가슴이 황포돛처럼 부풀어 올랐다.
한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아직은 보이지 않는 조선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가장 위험한 선교지 중의 한 곳으로 알려진 조선! 이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와 한 명의 프랑스인 주교 그리고 두 명의 프랑스인 신부를 비롯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가 피 흘린 순교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보다는 하루빨리 그리고 무사히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여덟 명의 조선인 신자들도 모두 한마음이었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으로 모셔 가겠다고 얼마 전 김대건 부제와 함께 상해에 온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1799~1846,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1785∼1868, 최형崔炯, 베드로, 1814~1866, 임치화林致化, 요셉, 노언익盧彦益, 임성실林聖實, 김인원金仁元은 모두 순교자들의 아버지요 아들이거나 친척이었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을 잃었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잔잔하던 바다가 성난 바다로 변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잔잔하던 바다에 거센 비가 몰아치며 큰 파도가 뱃전으로 밀려왔다. 그때부터 라파엘호는 파도를 타고 오르내렸다. 중국 선박에 연결된 밧줄 덕분에 북쪽으로 향하고는 있지만, 선원들과 신자들은 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과 바닷물을 쉴 새 없이 퍼내야 했다. 성난 바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몸부림쳤지만 라파엘호는 굵은 밧줄 덕분에 계속 산동반도를 향해 나아갔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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