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조사가 중요한 것은
《시로 국어 공부: 문법편》에서 나는 조사가 문장의 뼈대를 세우는 대목 같은 구실을 하고, 또 체언을 이리저리 부리는 장수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바로 이 문법의 대목이고 장수인 조사를 잘 부리는 지휘자가 아닐까. 우리가 유능한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알아야 할 조사의 모든 것을 지금부터 공부해 보자!
조사는 가끔 단어의 이미지나 문장의 분위기를 바꿔 시인의 본심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조사를 쓰지 않고 그런 이미지 일탈을 도모하려면 복잡한 장치가 필요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사를 적절하게 쓴 시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묻어난다. 이는 반대로 조사를 아무렇게나 쓰게 되면 시의 깊이가 감소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사가 달라지면 글이 풍기는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그 조사가 어떤 특정 상황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적절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조사를 쓰는 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조사에 민감해야 한다. 먼저 아래 시를 감상하면서 조사의 기능을 생각해 보자.
봄 2
이병기
봄날 궁궐 안은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御苑 넓은 언덕 버들은 푸르르고
소복한 궁인은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이 시의 밑줄 친 조사를 모두 아래와 같이 바꿔 보자. 즉, 조사 ‘은’ 대신에 조사 ‘이’를 쓰면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생각해 보자.
봄날 궁궐 안이 고요도 고요하다
어원 넓은 언덕 버들이 푸르르고
소복한 궁인이 홀로 하염없이 거닐어라
느낌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아마 여러분이 원래 시보다 고친 시에서 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사 ‘은’이 주는 느낌과 조사 ‘이’가 주는 느낌이 다른 것이다. 원래의 시에서는 봄날의 궁궐 안은 으레 고요하다는 당위론적인 사실을 밝힌 것으로 생각된다. 즉, 관념적인 봄의 느낌을 읊은 것이지 시인이 지금 눈으로 보면서 읊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고친 시에서는 봄날 궁궐 안을 죽 둘러보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읊은 것처럼 현장감이 살아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사만 ‘은’을 ‘이’로 바꿨을 뿐인데 느낌의 차이가 이 정도로 달라진다면 어떻게 시인이 조사를 가볍게 다루겠는가?
조사의 기능
○자리 기능
조사의 일차적 기능은 체언이 문장에서 어떤 성분으로 자리를 잡을지 결정해 주는 문법적 기능이다. 체언은 반드시 조사가 있어야 문장에서 어떤 자리를 얻게 된다. 자리를 다른 말로 격이라고 하고, 자리 기능을 위해서 사용되는 조사를 격조사라고 부른다. 주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주격조사, 목적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목족격조사, 보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보격조사, 관형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관형격조사, 부사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부사격조사, 서술어 자리에 쓰이는 조사를 서술격조사라고 분류하여 부른다. 문장에서 조사를 붙이지 않고 쓰이는 체언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조사가 붙지 않은 체언이 있다면 그 체언에 붙은 조사가 생략된 것이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 서울에 고층 건물이 많다.
위 문장에서 ‘서울’과 ‘건물’에는 조사가 붙어 있다. ‘에’는 부사격조사이고, ‘이’는 주격조사이다. 이 조사들 덕에 ‘서울’은 부사어가 되었고, ‘건물’은 주어가 되었다. 그러나 ‘고층’ 뒤에는 조사가 붙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명사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명사에 붙을 조사가 생략되어 있다. ‘고층의 건물’이나 ‘고층인 건물’ 구조로 ‘의’나 ‘인’이 생략된 것이다. ‘의’는 체언을 관형사로 만드는 관형격조사이고, ‘인’은 조사 ‘이다’의 활용형이다. 이렇게 보면 ‘고층’은 관형격조사가 생략된 관형어로서 ‘건물’을 꾸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체언은 조사를 대동하여 문장의 일정한 성분으로 자리를 잡는다. 조사는 체언과 숙명적으로 붙어 다니면서 체언을 안내하여 문장 안에서 체언이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자리를 잡아 주는 기능을 하는 문법요소이다.
물 이야기
이규리
잘못 쏟아버린 물이
상가 앞 인도에 흥건하다
기다린 듯 맹추위가
재빨리 물을 살얼음으로 바꾼다
이 길로 학원 가는 아이들 미끄러질까
더 얼기 전 비로 쓸어내니
움푹한 데로 얼음물 고인다
때맞춰 어디서 왔는지 꽁지 긴 새 한 마리,
겁도 없이 그 물 찍어 먹는다
오래 가물었구나
저 속이 갈급해 두려움조차 잊었으니
천천히 먹도록 떨어져서 망을 봐주었다
망 보는 나를 누가 또 망 봐주었다
잘못 쏟은 물이 아니었다
새 한 마리를 씻어준
새 한 마리가 나를 씨어준
환한 물
이 시의 중심 낱말인 ‘물’에 서로 다른 조사가 붙어 있고 또 조사가 없이 ‘물’만 쓰이기도 했다. 이 세 가지 ‘물’이 문장 안에서 어떻게 기능을 바꾸는지 검토해 보면 체언에 조사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① 잘못 쏟아버린 물이 상가 앞 인도에 흥건하다
② 기다린 듯 맹추위가 재빨리 물을 살얼음으로 바꾼다
③ 때맞춰 어디서 왔는지 꽁지 긴 새 한 마리, 겁도 없이 그 물 찍어 먹는다
④ 잘못 쏟은 물이 아니었다
⑤ 환한 물
①번 문장의 ‘물’은 주어, ②번 문장은 목적어, ③번 문장은 조사 ‘을’이 생략된 목적어, ④번 문장은 보어, ⑤번 문장은 조사 ‘이었다’가 생략된 서술어이다. 이처럼 체언에 어떤 조사가 붙느냐에 따라서 주어가 되기도 하고 목적어가 되기도 하고 보어가 되기도 하고 서술어가 되기도 한다. 체언은 조사를 통해서 문장에서의 기능이 결정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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