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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설이 사라지기까지
: 프리웰 이사장이 된 탈시설운동가 김정하
/ 홍은전 글
“시설에서의 하루는
먹고, 목욕하고, 싸고 끝이에요.”
― 거주인 황인현
이 모든 일의 시작
2007년 3월 서울역 앞에서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하고 있을 때 김선민이라는 젊은 여성분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자신이 일하는 김포의 석암베데스다요양원베데스다요양원, 2009년 향유의집으로 명칭 변경에 비리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서울시가 몇 개의 장애인시설에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있을 때였는데 요양원 측이 장부를 자동차 트렁크나 치료실 천장을 뜯어서 숨기고 있다고 했어요. 또 김포시에서 명절에 장애인 앞으로 준 2만 원짜리 농협상품권을 실제로는 다 빼돌렸으면서 마치 당사자가 직접 수령한 것처럼 서류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직원들이 지장을 찍었는데 한 손가락으로 찍으면 다 똑같으니까 손가락 열 개를 돌려가며 찍게 한 거죠.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그렇게 한 이상 자신도 저들의 비리 행위에 동참하게 된 것이 아닌가, 너무 괴롭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만약 이 사람이 비리를 목격하기만 하고 그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안 왔을 수도 있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저는 바로 직전까지 A재단의 비리에 맞서 싸우느라 법적 처벌을 받은 상태였어요. 그 법인은 이사장이 1984년 서울의 작은 방에 장애인 몇 명을 모아 살며 시작되었어요. 점점 규모를 확장하면서 강원도에 장애인시설, 정신병원 등의 시설 13개를 설립했고, 1년에 받는 정부 보조금이 100억이 넘었어요. 거기서 횡령, 성폭행, 강제노동, 폭행 사망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해서 이 문제를 알렸고, 2004년부터 시민단체가 연대체를 구성해 싸우기 시작했어요. 법인이 서울 종로구에 있었기 때문에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종로구청 앞에서 6개월간 농성을 했어요. 피 터지게 싸웠는데 결과적으로 다 실패했어요. 종로구청이 재단에 임원 해임 명령을 내렸는데 시설 측에서 그 명령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종로구청이 패소한 거죠. 당시 장애인들의 생계비를 횡령한 돈은 미국으로 보내졌어요. 그때 이사장 아들이 뉴욕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그 아들이 지금 버젓이 법인 이사장을 하고 있어요. 저로선 꽤 충격이었는데 그들의 세계에선 전혀 문제가 아닌가봐요. 내가 이상한 거지, 그들이 이상한 건지 참 모르겠어요. 법인이 크면 지킬 게 많고 지킬 게 많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 들죠. 정말 열심히 투쟁했는데 비리 재단의 임원을 해임조차 못 시키는 그런 시대였어요.
김선민씨가 찾아왔을 때의 저는 한마디로 시설 싸움에 징하게 데인 상태였어요. 그런데 석암재단 이야기를 들으니 이건 단순히 상품권 횡령 수준이 아니라 총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순간 두렵더라고요. 하지만 비리를 제보하러 찾아온 사람에게 침묵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선민씨에게 혼자 싸우면 위험하니 뜻 맞는 직원들과 거주인을 모으라고 조언했죠. 제가 탈시설운동을 하니까 선민씨처럼 제보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보통은 흐지부지돼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이 그 일을 굉장히 빠르게 시행하셨어요.
투쟁의 연판장을 올리다
직원들이 어느 정도 모였을 때 간담회를 했어요. 그 자리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박경석 대표와 민주노총 사회복지 노동조합 신현석 활동가도 불렀어요. 박경석 대표가 투쟁하자는 기조로 이야기했고 신현석 활동가는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임의조직은 공격당하기 쉽다며 노동조합 결성을 권유했죠. 선민씨는 직원들이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솔직하게 물었어요. 본인들은 생계를 걸었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느냐고요. 그런데 그게 한마디로 답하기가 어려워요.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싸워서 복직되기도 하고 복직한 후에 사측에서 괴롭힘을 당해서 결국 스스로 그만두기도 하거든요. 그 싸움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너무 힘들 것 같으면 안 싸우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물론 그분들이 용기를 내주길 바랐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분들 사이에 의리가 있었더라고요. 저같이 사회운동을 한 사람은 부정부패와 인권침해를 묵과할 수 없으니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그분들은 거주인의 삶을 무척 아끼셨던 것 같아요. 신변에 어떤 위협이 생기더라도 감수하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이거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야?’ 하다가도 ‘그거라도 해야지’ 하셨어요. 참 감사했죠.
얼마 후엔 베데스다요양원의 거주인 한규선·김현수씨가 저를 찾아오셨어요. 한규선씨 말씀이, 시설이 자신들의 돈을 다 빼앗아갔다고 했어요. 당시 장애수당이 한 달에 7만 원씩 나왔는데 자기는 돈을 받은 적이 없어서 보건복지부 게시판에 그 사실을 올렸대요. 그랬더니 원장시설장이 자기를 불러내 왜 그런 걸 썼느냐고 다그치면서 컴퓨터 사용을 금지했다고 하소연하셨어요. 이야기 도중에 한규선씨가 시설 직원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에버랜드에 놀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시더라고요. 한규선씨의 이야기는 그뿐만이 아니었어요. 발달장애와 신체장애가 중복으로 있는 분들에 대한 폭력과 학대도 비일비재했어요. 좁은 공간에 과밀한 상태로 수용되어 계셨는데 복도에 누워 있거나 기어 다니는 분들을 직원이나 원장이 걸리적거린다고 발로 찼고, 발달장애인을 문고리에 묶어두거나 팔다리를 묶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이건 딱 들어도 큰 사건이었어요. 아…… 이 싸움을 또 하는 구나, 두렵더라고요. 그날은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자는 말은 못 했고 일단 계속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만 했어요.
그분들이 몇 번 더 우리를 만나러 왔을 때 제가 물어봤어요. 만약 당신들이 들고 일어섰을 때 내부의 장애인 중에 뜻을 모아줄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요. 그랬더니 20명이 넘는다는 거예요. 오!!!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장애인시설이라는 곳이 구조적으로 그러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그러면 그 스무명으로 조직을 만들라고 제안했어요. 그 후 한규선씨가 시설에 사는 신체장애인들에게 몰래 연판장을 돌렸죠. ‘우리는 더 이상 못 참겠는데 너도 같이 폭로할래?’ 그러게 해서 스무 명이 넘는 분들이 모이셨어요. 당사자들의 그런 움직임을 보고 우리도 더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기존의 시설 싸움은 직원들의 내부고발로 시작해서 외부의 사회단체가 결합하는 식으로 이뤄졌어요. 피해 당사자인 시설 거주인이 싸움의 주체가 되었던 적이 없었죠. 그런데 석암재단은 달랐어요. 당사자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니까 굉장한 시너지가 나더라고요.
제일 먼저 한 일은 증거를 모으는 일이었어요.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나온 종이란 종이는 모조리 긁어모았어요. 밤에 몰래 들어가서 천장 속에 감춰놓은 회계장부들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도 하셨고요. 거주인들도 자신이 찍어놓은 사진들,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팔다리가 묶여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주셨어요. 그 자료를 모아 2007년 4월 대검찰청에 내사를 의뢰했어요. 검찰이 내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도 싸움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세 개의 조직이 만들어졌어요. 장애 당사자 조직 ‘석암재단 거주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석암 비대위, 직원 조직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 공공노조 사회복지지부 석암재단지회’석암 노조, 그리고 시민사회 연대조직 ‘석암재단 비리척결과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석암 공대위까지. 그 후 2008년 1월 비리 책임자들 13명이 검찰에 고발됐어요. 그동안 비밀스럽게 움직이던 세 조직이 2008년 1월 4일 양천구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존재를 드러냈죠. 우리가 석암재단을 고발했음을 알리고 책임자 처벌과 이사진 전원 교체를 요구하면서 싸움이 시작됐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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