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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굴
이것은 지난 6개월간의 회고록이다.
첫발을 내딛은 날 찍은 사진.
여간해선 셀카를 찍지 않는 나이지만 이날은 예외였다.
중요한 결심을 한 날의 얼굴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기억해야 할 얼굴이 또 하나 있다.
기후 세대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그레타 툰베리에 대해 말하지만
그레타가 그레타가 된 데엔 이유가 있다.
나는 한 나라가 어떤 인물을 ‘배출’했다고 자랑하는 게 우습다.
실제로는 쓰레기처럼 배출이나 하면서. 우리가 딱 그렇지 않은가.
그레타가 나왔다면 제일 멀리 내다 버렸을 나라다. 그 증거가 이 아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세상에 온전하게 들리려면 알아볼 관찰자가 있어야 한다.
이곳엔 관찰자는 없고 못난 주인공들만 많다.
요즘 소설에 등장하는 관찰자 시점들은 꾸며 낸 관찰들이다.
소설가라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밖에 관심 없는 작자들뿐이다. 그래서 소설을 안 읽은 지도 꽤 됐다.
여긴 좋은 조연도 없다. 국산 영화의 흔해 빠진 1차원적 감초 캐릭터 따위 말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조연 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좋은 관찰자요 좋은 조연이다.
가진 건 없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확실하다고 자부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도 제2 바이올린, 조력자 역할은 자신 있다.
문제는 지금껏 정말로 돕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 혹은 못 만났거나.
어디선가 이런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진짜 세상은 창문 저 너머에 있고
나는 늘 바깥으로 나가면 보일 세상을 꿈꾸지만
막상 나가면 꿈과 딴판이란 걸 알기에 늘 주저만 한다.
대강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난 항상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멀리서, 미지의 세계를 선망하는.
저기 그 애가 있다. 피켓 시위 중이다.
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아이인지 아닌지 모른다. 어쩐지 아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여자 같지만 그것도 확실치
않다. 이름도 모른다. 소속도. 아마 없을 것이다. 항상 혼자다.
국회도, 청와대도, 정부 부처도, 대기업 앞도 아닌 시민 단체 앞에
서서. 독특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공격적인 피케팅 방식 때문에
엔지오계에서 공포의 시위꾼으로 소문이 났다. 우리는 보통
손가락질을 지양한다. 사람 말고 죄를 미워하자-주의다. 저건 완전히
반대의 접근이다. 날것의, 적나라한 겨냥. 지적질. 실명 거론.
왜 아무도 저 아이를 제지하지 못할까? 인신공격에 가까운 도발을
하는데도 못 본 척 피하기만 한다. 너무 어려 보여서? 괜히 상대했다
골치만 아플 것 같아서?
내가 보기엔, 맞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누구나 느끼지만
차마 못 꺼내는 말들이 있다. 시민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 시점에, 그 어느 때보다 후퇴하고, 본질에서 벗어나고, 제도권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는 주류 시민 단체들을 발가벗기는 적나라한
사실 적시. 겉으론 기후 행동을 외치지만 온갖 교묘한 방식으로 기후
무행동에 이바지하는, 썩어 빠진 시민 사회 상층부의 실상을 어떻게
저렇게 놀라울 아니 섬뜩할 정도로 속속들이 아는지, 단체들이
내부자 정보 유출을 심각하게 의심할 정도였다.
난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차 있지만 뜯어보면 지극히 무능하고, 무기력하고, 이기적이고,
시기심 가득하고, 심지어는 부도덕하고 부패한 주제에 헛바람만
잔뜩 들어 이제나저제나 당·정·청에서 불러 주길 고대하는 시민 단체
간부들을. 일다운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정부 자문 위원이란 간판을
챙기는 데, 그걸 명함과 이메일 하단에 잽싸게 새기는 데 선수인
자들. 그러다가 작은지극히 정당한 비판이라도 받으면 진심을 몰라
준다며 무한히 삐치고 좀스럽게 앙심을 품거나, 십자가를 진 자가
무지한 인간들에게 불가피하게 먹는 욕이라고 해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미 정치인보다 더 두꺼운 방탄 인두겁을 쓴, 그런 부류들.
내부 비판은 없냐고? 없을 리가. 사석에선 홍수처럼 넘쳐난다.
하지만 앞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잘 지낼 수가 없다. 각자의
입장이 있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더 큰 적이 있으니 사소한
허물에 매몰되지 말자는 식. 그러면서 허수아비만 패고, 뒤에선
끝없이 서로를 헐뜯는 동네. 이런 관행에 익숙해진 그들이 새파란
어린애에게 실명으로 욕을 얻어먹고 얼마나 진노했던지… 내가
들은 후일담만 해도 한 보따리다. 정밀하게 조준한 1인 시위로 자칭
거물들의 머릿속을 여러 번 벌집 쑤시듯 헤집어 놨으니 그 정도면
성공한 전략 아닌가? 나 같은 경력자가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다.
그날도 연대체 회의차 다른 단체국내 최대의 환경 엔지오
사무실을 방문한 날이었다. 그 아이를 본 건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으로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 사람을 돕고 싶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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