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내며
하이델베르그대학 도서관에서 대한제국 찾기
2017년 5월부터 2019년 2월까지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냈다. 당시 독립기념관으로부터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련 자료 수집을 의뢰받았다. 나의 작업은 일제강점기 1904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주요 일간지에서 보도한 조선과 관련된 기사를 수집하고 번역하는 일이었다. 〔2019년 3월 독립기념관 자료집은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총서 제43집 『독일어 신문 한국관계기사집』으로 출간되었다.〕
매일매일 어스름 날이 어두워지면 자료 조사를 위해 하이델베르그대학 중앙도서관의 수만 개 책장이 만든 미로에서 입구 찾기를 반복하였다. 대학 중앙도서관은 독일어로 Universität Bibliothek이라고 하며, 줄여서 UB라고 한다. 나의 작업은 UB 사서들에게조차 생소한 자료였기에 어쩌다 문의라도 하면 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인들의 동쪽에 숨어 있는 작은 나라, 조선에 관한 독일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음이 예상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2000년부터 박사과정 동안 2년여 재직했던 중국학과 도서관의 디지털 자료실 EVOCSEuropean Virtual OPAC for Chinese Studies를 이용하면서 자료 찾기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후 독립기념관 신문자료 목록과 별개로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을 다녀간 독일인들의 여행기 목록이 만들어졌다.
1장에 있는 크노헨하우어의 「Korea」 강연문은, 어느 날 하이델베르그대학의 도서관 사서가 지질학과 도서관에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시내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자연과학과 의과대학 건물이 산재해 있는 노이엔하이머팰트 캠퍼스에 있는 지질학과 도서관까지 가야만 했다. 그곳은 수십 동의 똑같은 건물이 번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질학과 도서관은 348동에 위치했다.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찾은 파일에는 ‘자료 분실’이라고만 표시된 채 아무것도 없었다. 담당자는 당황하며 메일로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몇 주 후 자료로 받은 크노헨하우어 강연문은 A4 55쪽에 달하며, 그가 1898년 Korea를 방문하여 직접 경험한 내용이었다. 그는 베를린 식민지연구회에서 자신이 보고 온 조선에 관해 강연하였다. 이 책의 구상은 그때 시작되었다.
2장에 등장하는 조선 여행기의 주인공 예쎈 박사는, 19세기 말 독일에서 동아시아학회가 결성되던 시기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공예사를 중시하는 연구자였다. 그는 내가 속한 독일 예술사 연구자 사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주장하는 생활공예품의 예술사적인 평가, 그리고 문헌을 통한 예술사 연구방법론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예술사도서관구축 등은 독일 예술사학에서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2008년, 그가 태어난 지 150주년 되는 해 베를린에서 그를 기념하는 도록이 발간되었다. 〔『독일제국부터 자유민주국가까지 박물관 일상Museumaltag vom Kaiserreich bis zum Demokratie: Chronik des Berliner Kunstgewerbemuseum, 2008』〕 그는 1913년 미국을 거쳐 일본→조선→중국→러시아를 여행했다. 도서관에서 아직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조선 여행기를 발견한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이 흐르고 가슴이 설레었다.
하이델베르그대학 도서관은 독일 내에서 발행된 잡지와 책을 모두 구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어느 날 다른 주제와 함께 뒤섞여 깊숙이 숨어 있던 다섯 장 분량의 백두산 여행기가 이 책의 3장 내용이다. 라우텐자흐 교수의 1933년 조선 여행기는 지리학회지의 주요 논문 목차 다음의 짧은 답사 기록일 뿐이었다. 나는 그의 답사기와 당시 사진을 통해 백두산 지역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생활 모습이 독일 교수의 연구노트에서 발견된 것이 놀라웠다. 그의 이베리아반도 지형 연구는 동일한 북위도상에 자리한 조선반도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그는 궁핍한 연구자였지만 독일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유럽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등칸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수십 년 동안 그가 경험한 유럽의 지형학이 과연 동아시아 조선의 지형과 어떤 차이점이 있고 또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길고 긴 그의 여정은 기대감에 부푼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순간순간들이다.
광산 채굴권을 얻기 위해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인
‘1.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의 황금사과인가?’는 1898년 2월 제물포항에 도착, 1899년 6월까지 강원도 김성金成 당고개堂峴 금광에 머물면서 채취작업을 관리한 독일 산림청 공무원 크노헨하우어Knochenhauer, Bruno 1861-1942의 강연문 「Korea」 전문이다. 그는 베를린 독일식민지협회에서 1901년 2월 25일 조선에 관한 대중강연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에 관심 있는 자본가, 상인과 동아시아 관련 학자에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그의 최종 목적지인 당고개의 지형과 금광 채굴 과정에 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동아시아의 황금사과인가’는 번역 후 필자가 붙인 제목이며 유럽 대륙에서 보는 대한제국의 지정학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1899년 6월 크노헨하우어는 대한제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하인리히 왕자Heinrich Albert Wilhelm, Prinz von Preussen 1862-1929를 따라 군함을 타고 칭다오를 거쳐 귀국길에 오른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프랑케Franke, Otto 福蘭閣 1863-1946가 1899년 9월 13일부터 10월 9일까지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프랑케는 1889년부터 1901년까지 약 13년 동안 베이징의 독일 영사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였다. 근무 당시 중국은 물론 몽고, 러시아, 일본을 샅샅이 여행하였고, 귀국길에 대한제국, 포모사대만를 여행하였다. 그는 귀국 후 1910년 함부르크대학에 중국학과를 만든 장본인이다. 또한 1909년 자오저우만교주만 칭다오대학 창립에 관여하였으며, 그의 저서 『중국사Geschichte des chinesischen Reiches 1932-1952』는 랑케Ranke, Franz Leopold 1795-1886 역사관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관, 랑케와 람프레흐트Lamprecht, Karl 1856-1915의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의 논란은 프랑케에 의해 중국사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랑케에게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것이고, 람프레흐트에게 역사는 “왜 그렇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후 프랑케의 중국역사서는 서구의 역사발전단계의 관점에서 중국사를 무리하게 해석하였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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