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메멘토 모리,
1968년 6월 15일
누군가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밤 11시 10분경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일까. 무슨 일일까. 문을 열었더니 길가 아랫집에 사는 농사꾼 아저씨다. 집 앞 길가에 세 집이 있었는데 떡집 위로 다음다음 집 아저씨였다.
“큰일 났어요. 아무래도, 집주인이신 거 같아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김 선생 들어오셨는지요?”
“아뇨, 아직…….”
“사고가 났어요. 타이어가 퍽,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암만해도.”
아내 김현경金顯敬의 머리칼이 쭈뼛 선다.
“큰 소리가 나서 도로가 보이는 창문을 열어보니 버스가 서 있었어요. 잠시 후 널브러져 있는 사람을…….”
아랫집 아저씨는 말을 잇지 못한다.
“방금 버스가 쓰러진 사람을 싣고 갔는데, 필시 김 선생 같아요. 빨리 그 버스가 어디로 갔나 찾아보셔야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아저씨는 울상이다. 부들부들 떠는 아내는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도 못한다. 오한 걸린 몸처럼 떨릴 뿐이다. 침착하자. 먼저 파출소에 가서 신고하자. 집 앞 언덕 위에 있는 파출소로 가려는데, 마침 순찰하는 지프차가 길가에 서 있다. 아내는 남편을 찾기 위해 지프차를 탄다. 마포 공덕동에 불 켜진 병원이 있어 순경과 들어갔더니 의사가 말한다.
“아, 왔었어요, 우리 병원에서는 손 못 댈 상태라서 얼른 큰 적십자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방금 갔어요.”
아내는 다시 지프차를 타고 적십자병원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남편과 지냈던 아름답고 신기했던 혹은 부부 싸움을 하던 영상들이 고장난 영사기처럼 엉켜서 덜컹이는 차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적십자병원 중환자실에 남편은 산소호흡기를 하고 누워 있다. 사고 날 때 타박상인지 불어터지듯 부은 손에는 이미 시꺼멓게 멍이 퍼졌다. 거렁거렁 목에서 끓는 소리를 내는 그의 큰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건 환자 머리가 깨져서 그래요.”
입을 다물고 있던 의사는 짧게 말하며 플래시로 남편의 뜬 눈을 비춰 본다.
“동공이 안 움직여요.”
휑하니 뜬 큰 눈은 빛을 잃으며 꺼져가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눈을 감겨드린다. 다만 그때 남편의 목에서 컬컬, 커얼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아내는 잠시 희망을 가진다. 제발, 이 상황이 거짓말이기를, 그냥 악몽이기를, 시간이 멈춰 서기를, 아니 하루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까만 머리, 짙은 눈썹, 긴 코, 잘생긴 남편의 얼굴을 아내는 몇 번이고 쓰다듬는다. 갑자기 해일처럼 형용 못할 감정이 밀려온다. 여보, 미안해, 나 땜에 맘 고생 많았지, 내가 속 많이 썩였지, 현경은 밤을 뜬눈으로 지샌다.
김수영은 김현경이 사준 슈트를 입고 귀가 중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수영을 위해 현경은 평소 옷을 마련할 때마다 신경을 썼다. 여름에는 시원한 ‘포오라’ 신사복을, 겨울에는 곤색 플란넬 모직 셔츠나 신사복을 준비했다. 수영은 키가 커서 사이즈가 큰 옷을 입어야 했다. 48사이즈로 양복을 사면, 소매나 바지 기장을 고치지 않고 딱 맞았다. 현경은 외국인 옷을 파는 도깨비시장 구제품 가게에 새벽에 가서 수영에게 세비로せびろ, 背広를 사서 입혔다. 양복 안에는 현경이 재단해서 만든 올리브색 노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세비로 안주머니와 바지 주머니에, 수영이 마지막으로 번역한 뮤리엘 스파크의 『메멘토 모리』의 번역료가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할 때 현경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필이면 번역 원고 제목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여서 마뜩잖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졌다.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행복하게 살던 집터, 바로 그 앞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좁은 길에서 엇갈리던 버스 두 대 중 한 대가 인도로 뛰어들어 생긴 사고였다. 집에서 동쪽으로 다리 건너 서강에 1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서강에서 마포, 서대문, 종로를 지나, 종로 5가에서 정릉까지 가는 편리한 노선이었다. 집앞 정류장은 종점에서 출발해 첫 번째 정류장이어서, 승차를 했을 때 늘 좌석이 비어 있어 이용하기가 편했다. 밤 11시 차가 막차였다. 막차로 들어오는 버스와 정릉으로 나가는 다른 막차 버스가 겹치는 순간이었다. 당시 집 앞 길은 2, 30도 정도의 경사가 질 정도로 언덕이 꽤 높았다. 막차여서 타는 손님도 별로 없고, 그저 목적지에 빨리 가기 위해 두 대의 버스는 빠르게 달렸다. 변두리 도로는 한가운데만 적당히 아스팔트 흉내를 내고, 나머지 길가는 인도랄 것도 없는 비포장이었다. 수영은 떡집 앞 정류장에서 내려 천천히 길가를 걷고 있었다. 좁은 2차선 도로를 헤드라이트를 켜며 엇갈리던 버스 중 한 대가 길가를 걸어가는 사내를 치어버린 것이다. 버스가 사내의 머리 뒤통수를 치면서 사내의 가냘픈 몸은 높이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퍽, 하는 큰 소리는 골이 깨지는 소리였다.
사고가 나기 전날, 수영은 신구문화사 신동문 주간에게서 번역료 10만 원을 받았다. 3만 원은 상의 안주머니에 챙기고, 나머지 7만 원은 봉투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현경은 안주머니에 든 3만 원을 보며 습관대로 술값으로 ‘삥땅’을 떼면서도 아내에게 줄 7만 원을 잊지 않았던 남편 수영을 내려다보았다. 남편의 부서진 머리를 보고 있자니 현경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정신을 가다듬은 현경은 열여덟 살 큰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준이야, 엄마야. 4시에 통금 해제되자마자 도봉동 할머니 댁에 가서 큰삼촌, 큰고모, 막내삼촌 모셔와. 빨리 택시 타고…….”
시댁에는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양계하던 도봉동 할머니 집에 어서 사고 소식을 알려야 했다. 김수영은 평소 현경을 여보가 아니라 ‘여편네’라고 불렀다. 그럼 남편이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 현경은 너무 서럽고 억울했다. 내 남편은 눈꼽만치도 잘못한 게 없어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거나 교통 위반을 해서 도로로 들어간 것두 아니라구요. 마음 같아서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번역료를 품고 멀쩡하게 걸어서 귀가하던 수영을 초를 다투는 속력을 내면서 잔혹하게 치어버린 시내버스가 원망스러웠다. 누워 있는 이 사내가, 내 남편, 김수영이 맞는가, 그 순간, 여편네, 부르는 소리에, 언뜻 고개를 드니 병원 창밖으로, 희뿌옇게 밝아오는 동녘과 함께 가족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여동생 김수명은 그때의 상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수명은 누워 있는 오빠 옆에 섰다. 오빠의 왼팔은 찰과상을 입어 하얀 붕대로 두껍게 감싸여 있었다. 유정 외에 작가 몇몇이 벌써 와 있었다. 아직 숨을 쉬는 듯했지만 오빠와 대화는 전혀 할 수 없었다.
“만약 오빠의 의식이 살아 있어서 주변에 가족을 바라보고, 친구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해보세요. 고통을 참는 모습을 가족들이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오빠는 마치 배웅하려는 이들에게 편한 마음을 주려는 것처럼 조용히 떠났어요. 오빠의 마지막 순간이 어쩌면 가족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걸 너무 고맙게 생각해.”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김수명은 오빠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오빠의 배려였다며, 고맙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침 8시 의사는 산소호흡기를 벗겼다. 가느다란 싸움도 포기한 김수영의 얼굴은 풀리고 고요해졌다. 김현경이 흐느끼면서 두 눈을 감겨주었다. 그의 삶이 끝난 것이다. 1968년 6월 16일, 48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끝내고 김수영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無 속으로 들어갔다.
김현경은 수영의 마지막 순간을 8시 50분이 아니라, 새벽 5시 30분쯤으로 기억한다. 크르르륵 밭은 숨소리를 내던 그에게서 산소호흡기는 더 이상 구원의 동아줄이 아니었다. 48년간 그를 담았던 몸을 떠난 김수영은 시혼詩魂을 남기고 무한無限으로 떠났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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