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라이오니
나는 혼자 이곳에 왔고,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루지가 함께 가주겠다고 했을 때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용기와 대담함도, 생존 지식도 부족하면서 대체 왜 혼자 오겠다고 우겼던 걸까. 후회하면서도 나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었다. 나 역시 로몬으로서 멸망의 현장을 마주할 수 있다고, 내가 심약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시스템이 오직 나만을 지정해 의뢰한 이 미지의 장소를 무사히 탐색하고 돌아가겠다고. 그러나 고작 자기 증명을 목적으로 오기에 이곳은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지난 사흘간 죽을 위기를 네 번 넘겼다.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고, 시체가 되어 벌레에게 파먹히는 나의 최후를 상상했다. 포기하고 되돌아가자고 생각한 것도 수십 번이었다. 담대한 다른 로몬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불행히도 이곳의 구조는 미로처럼 꼬여 있어 나는 길을 잃었다. 최선을 다해 출구를 찾고는 있지만, 어쩐지 그 노력이 나를 더욱 깊은 미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어제까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오늘 내가 같은 복도를 다섯 번째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기록한 지도는 엉망이었다. 그것이 지도 기록에서 음성 기록으로 일지 형식을 바꾼 이유다.
만약 내가 트랩에 걸려 사망하거나 실종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면, 이 기록의 1차 조회 권한은 나의 친구 루지에게 있다. 귀찮은 뒤처리를 맡겨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래, 루지, 네 말을 따를 걸 그랬다. 다음에는 네 말을 듣겠다. 다음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
그럼 다시 기록을 시작하겠다.
오늘은 3420ED 거주구 탐사 열흘째. 3420ED는 지독하게도 넓고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한 곳이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함정과 지뢰, 플라스마 보안 시스템을 제외하면 말이다. 거주구 내부에는 과거 문명에 대한 단서가 될 법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래위로 높게 뻗은 건물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원통형의 도로 등 거대 구조물의 잔해로 보아 한때는 아주 번성했던 문명으로 추정되는데도,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추측해볼 만한 일상적인 물건들은 깨끗이 청소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들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 같다. 그 기묘한 결벽증을 지닌 존재들은 누구인지, 이곳에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이 장소에 관한 정보를 접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로몬들 사이의 소문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는 루지가 먼 행성계에서 발견된 의문의 우주 거주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근 지역을 지나던 광역 탐사선이 처음으로 이곳을 발견했는데, 외견상 최소 천 년 이상 지난 인공 구조물로 추정되며, 현재의 기술 수준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진보한 기술 문명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학자들은 이곳을 3420ED라고 명명했다. 거주 가능한 행성이 전혀 없는 행성계의 세 번째 궤도에 홀로 떠 있던 3420ED의 존재는 많은 로몬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고립 문명이 멸망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별안간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음모론자들과 역사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담한 로몬 몇몇이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 허가를 받아냈다가, 거주구에 도킹하기 직전 선함을 돌려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은 이 거주구가 변이 외계 곤충으로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 말을 믿은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탐사 중인 나의 견해에 따르면, 이 곳은 변이 곤충은커녕 한때 생명체였던 유기물이 한 줌이라도 발견될지조차 의심스러운 장소였다.
3240ED에 모였던 관심은 금방 흩어졌다. 로몬의 기준으로 판별해보면, 이곳이 여러 소문의 원천지가 되긴 했으나 소문은 단지 소문일 때 더 흥미로운 법이고, 실제로는 특별한 희소자원이나 정보 의뢰가 없어 탐색할 필요가 없는 ‘가치 없는 멸망’의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은 이곳에 가겠다는 나를 말렸다. 이곳은 탐사할 가치가 없고, 아직 분진을 통한 정화 작업조차 진행되지 않아 불필요하게 위험하다고 말했다. 로몬들은 은하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위험을 즐기는 부류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대단히 계산적으로 위험을 감수한다. 단지 위험하기만 하고 위험을 대가로 얻어낼 만한 것이 없는 곳에는 잠깐의 시선조차 두지 않는다.
어쩌면 친구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동료 로몬들의 태도를 배워야 했다. 나흘간 쉬지 않고 걸었지만 의미 있는 단서를 찾지 못했다. 여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지난 기록 이후 사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패널 시계까가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전원이 완전히 나가버린 디바이스를 작동시키는 데에 겨우 성공했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나는 공격당해 의식을 잃었고, 어제 깨어났다. 나를 공격한 것은 기계들이었다. 이곳의 함정들은 단지 오래전 멸망을 맞이한 인간들이 설치해둔 것뿐이라고, 지금은 이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이 틀렸다. 이번에도 잘못된 판단이라니. 나의 기록은 죄다 이런 식이다. ‘오판이었다’ ‘실수였다’…….
기계들은 3420ED의 복잡한 미로 가장 안쪽에 그들만의 소박한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나에게 준 사전 정보로 추측해보자면, 이곳에서 거대 문명을 이루었던 인간들은 감염병으로 모두 사망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그러나 기계들은 감염되지 않았고 살아남아 거주지 일부를 차지했다. 그들이 거주지 전체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간들이 설치해둔 함정을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넓은 공간 전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계 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이곳 거주구가 감염병으로 멸망했다는 최초 보고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기계 혁명으로 멸망한 거주구에서 두 번쯤 회수 작업을 수행한 적이 있는데, 이곳과 비슷한 상태였다. 기계들은 통로에 걸리적거리는 부패 유기물이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계들이 인간 지배자를 대체한 거주구에서는 인간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유기물이나 흩어진 사체, 지문이 남은 소도구들 따위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판단을 내리기에는 정보가 부족하다. 이곳의 기계들은 반란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공격적이지 않다. 그들은 나를 밀폐된 방에 가두었지만, 나를 공격하거나 학대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이 방은 대기의 질이 인체에 적합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호흡 보조 장치 없이도 숨을 쉴 수 있는데, 기계들에게는 이 대기 조성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그들은 의도적으로 나를 살려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내게 가하는 학대는 고작해야, 목이 마르다는 호소에 썩은 달걀 맛이 나는 물을 건네주는 수준에 불과하다.
셀. 나를 붙잡은 기계는 자신이 셀이라고 말했다. 기계들의 대화로 추정하자면 셀은 기계들의 리더로, 거주구의 전체 시스템을 맡은 개체인 듯하다. 셀은 시각을 잃은 로봇, 정확히는 광학 기호 입력기를 잃은 기계다. 이렇게 고립된 거주구에서는 고장 난 것들을 대체할 부품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셀의 본체 금속 표면에는 매우 유려하고 섬세한 음각 장식이 새겨져 있어 한때 그가 기계로서 가졌을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셀은 어울리지 않는 부품들을 온몸에 덧붙여서, 고물상에서나 발견될 법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기계 키메라가 된 셀은 비틀거리며 움직인다. 앞을 보지 못해서인지 자주 멈추며 부자연스럽게 미끄러진다. 무언가에 부딪칠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난다.
셀은 나에게 말한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라이오니. 넌 라이오니다.”
나를 처음 마주쳤을 때 셀은 말했다.
“라이오니, 드디어 돌아왔구나.”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라이오니’라는 자가 아니라고, 단지 이곳을 조사하기 위해 온 로몬에 불과하다고 말하자 기계들은 나를 가두어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라이오니는 이 거주지의 멸망과 긴밀히 연관된 존재로 추정된다. 기계들은 혹시 내가 이곳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믿는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걸까. 기계들은 나에게 수십 년은 묵은 듯한 끔찍한 통조림을 가져다주고, 나는 얌전히 음식을 입에 넣는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들과 또다시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우려스러워 가급적이면 말을 걸지 않는다. 몇 번은 용기를 내어 “이봐. 날 밖으로 보내줘”라고 말해보았지만, 기계들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만이 물끄러미 나를 향할 뿐이었다.
내 생각에는, 셀이라는 그 미쳐버린 리더 외의 다른 기계들은 내가 라이오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다. 그들은 나를 라이오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왜 알면서도 나를 풀어주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심란하게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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