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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장면 #1] 대한민국의 앵커는 무슨 휴대폰을 써야 하는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2015년 초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소포가 하나 전달돼 왔다. 열어보니 삼성의 신형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간단한 메모도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앵커께서 아이폰을 쓰시는 건 좀 어울리지 않습니다.’
소포를 보낸 사람은 삼성의 잘 아는 임원이었다. 그가 삼성으로 직장을 옮기기 전부터 오랜 기간 아주 가끔씩 밥은 먹던 사이였다. 각각 언론사와 재벌기업에 속해 있다보니 거북한 일도 있었으나 그것으로 친분을 해치진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도움을 줄 일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개인 대 개인이었다.
나는 뉴스를 진행할 때 스튜디오의 데스크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곤 했는데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그게 무슨 기종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도 그걸 보다가 어느 날인가 문득 자신의 회사 폰을 보낼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손에 익지 않은 다른 회사 제품을 쓰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이미 새로 나온 버전의 아이폰을 구입한 터였다. 크기도 기존의 모델보다 더 크게 나온 것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룸」의 데스크 위에는 커다란 신형 아이폰이 놓였다. 그도 당연히 보았을 것이다. 그날 받은 폰을 돌려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선 너무 탓하지 마시길. 그때는 김영란법도 나오기 전이었다. 굳이 다시 돌려보내는 건 결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 그래도 당혹감을 느꼈을 터이므로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함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가 휴대폰을 보내온 것은 가만 생각해보면 나름의 뜻이 있어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종의 개인적 관계 복원의 표시랄까…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로부터 일년여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내 추측이 꼭 틀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장면 #2] “손 사장, 그거 내보낼 수 있어요?”
JTBC로 와서 처음으로 「뉴스9」을 진행한 지 3주일 정도가 지난 2013년 10월 초순이었다. 정의당의 심상정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요한 문건이 하나 있으니 직접 사람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삼성 관련 건’이라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손 사장이 못 낼 거면 얘기를 해달라. 그러면 다른 언론에라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 의원이 내가 못 내리라고 한 것은 그 이유가 뻔했다. JTBC는 어차피 삼성과의 관계가 있는데 낼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는 왜 그 문건을 내게 보내주겠다는 걸까. 그 또한 뻔해 보였다. 일종의 역발상인 것이다. 삼성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세간에 인식돼 있는 JTBC가 내면 반향反響이 더 있으리라고 봤을 것이었다. 내가 삼성 관련 보도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공언을 해왔으니 일종의 시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을까?
그러나 그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 첫째, 나는 이미 JTBC로 올 때부터 언젠가는 삼성 관련 이슈를 제대로 다룰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반의 인식 속에서 삼성과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JTBC라는 매체의 뉴스는 생존할 수 없다고 봤다. 그 시기가 심 의원으로 인해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둘째, 적어도 형식적으로 JTBC와 삼성 간에는 아무런 고리가 없었다. 삼성이 중앙일보나 JTBC의 지분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물론 중앙일보의 태생이 삼성 쪽에 있고,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의 광고 집행이 중앙일보나 JTBC의 주요 재원인 것은 맞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변수일 수 있다는 추정도 타당했다. 물론 지금은 적어도 JTBC에 삼성은 광고를 거의 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사주社主 간의 인척관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언론매체로서의 JTBC는 삼성 관련 이슈가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오해받고 공격당할 것이었다. 셋째, 내가 JTBC로 올 때 대외적으로 삼성 문제를 공정하게 다룰 것이라고 공언했을 뿐 아니라, 대내의 최고 경영진에게도 그렇게 공언한 바가 있었다.
문건은 테이프로 칭칭 감싼 누런 대봉투 속에 있었다. 엔간히 중요한 문건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그 안에 든 문건은 삼성의 노조 무력화 전략이 담긴 것이었다. 제목은 ‘2012년 S그룹 노사전략’이었고, 여기서 S는 당연히 삼성의 이니셜이었다. 그리고 그 문건이야말로 향후 7년이 넘도록 삼성을 괴롭히고, 관련된 전·현직 임원들이 징역형을 받게 했으며, 결국엔 삼성의 그 유명한 무노조 경영을 포기하게 한 단초緞綃이기도 했다. 또한 내겐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이른바 ‘어젠다 키핑’의 개념을 머릿속에 그리게 한 시초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당시엔 그런 결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즉 삼성그룹의 노조 무력화 전략은 무려 110페이지에 달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문제 인력’을 감시하는 수준은 심각해 보였다. 일부 계열사의 경우 개인적 취향, 사내 지인, 자산, 심지어 주량까지 체크해서 이른바 ‘100과 사전’을 만들었다. 누가 봐도 위법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들에 맞설 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이른바 ‘사내 건전 인력’을 사업장마다 선발해서 조합 활동을 방해하고 회사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 물론 이들에게는 적절한 인센티브를 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동시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담당 취재부서장이었던 사회2부장에게 문건을 넘기고 확인 취재에 들어가달라고 했다. 취재는 철저하게 보안을 지키는 가운데 진행됐다. 아마도 이 취재의 하이라이트는 삼성의 홍보실에 JTBC의 기자들이 찾아가 해당 문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날 홍보실에 들어간 기자들 중엔 훗날 내 후임으로 「뉴스룸」의 앵커를 맡은 서복현도 있었다.
삼성 입장에서 보자면 JTBC의 기자들이 다른 것도 아닌 노조 무력화 관련 문건을 들고 그룹의 핵심으로 찾아온 것은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기자들이 찾아가 해당 문건을 들이밀었을 때 홍보실 담당자의 반응은 한마디로 당혹이었다. 전해 들은 바로 그는 문건을 훑어보자마자 혀를 쑥 내밀었다고 한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보도를 사흘쯤 남겨놓았을 때 심상정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 사장님, 아무래도 어렵나보지요? 그러면 제가 『한겨레』 쪽에 넘길까 하구요.”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아예 심 의원님까지 모셔서 심층적으로 다룰까 하는데요?”
심상정 의원은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 속칭 ‘밀당’을 했던 것 같다.
[장면 #3] “뱉어놓은 말이 있으시니…”
2013년 10월 14일.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당일의 뉴스 런다운리포트 편집순서를 기록한 리스트로 보도국 내 기자들에게 온라인으로 공지된다에는 톱뉴스가 공란으로 돼 있었다. 톱뿐 아니라 그 밑으로 몇개의 공란이 이어졌다. 취재 자체도 극비였고, 뉴스가 나갈 때까지 관련된 사람들 외에는 모두 모르도록 했다. 보안 유지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도 「뉴스룸」에서 이런 경우는 몇 번 더 있었다. 세월호 때도 그랬고, 태블릿PC 때도, 미투 때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보도국 안팎에선 ‘뭔가 또 큰 게 있구나’ 하곤 했다.
최고 경영진에게도 당일 오전에야 알렸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사이 삼성 내부는 긴박하게 돌아갔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는 이쪽에서도 파악하고 있었겠으나 나는 어느 쪽의 반응이든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처음에 부임할 때 내게 보도에 관한 한 전권을 맡긴 최고 경영진의 약속은 그때 첫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이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는 것이다. 어느 임원이 뒤늦게 보도 내용을 파악하고 내게 했던 말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뱉어놓은 말이 있으시니…”
[장면 #4] “반론은 마지막에…”
뉴스가 시작되기 두시간쯤 전에 나는 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사이였던 그가 일과 관련해 처음으로 연락을 한 셈이었다.
“그냥 한가지만 부탁하자면 우리 측 반론을 맨 마지막에 넣어줬으면 합니다. 심상정 의원이 우리 반론 다음에 출연하면 또 재반론을 할 텐데 그때는 우리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편집권과 관련된 일이기는 했으나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리고 보도 내용에 대한 반론은 대개 맨 마지막에 넣어왔으므로 굳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됐을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날의 뉴스는 노조 무력화 문건에 대한 보도와 심상정 의원 출연, 그리고 삼성 측의 반론 등 모두 다섯 꼭지로 나갔다.
삼성의 반론 요지는 얼핏 보기에도 다급함이 드러났다. ‘그 문건은 삼성이 만든 것이 맞다. 바람직한 조직문화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성은 그동안 노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기업경영을 추구해왔으며, 애플, 구글도 노조 없이 글로벌 기업이 됐다. 이 문건은 종업원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조직 분위기를 활성화하자는 데 중점을 뒀다’는 것. 내 입으로 보도하면서도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른바 ‘100과 사전’이 휴머니즘의 영역에 속하게 됐다니…
그렇게 해서 JTBC와 삼성의 불편한 관계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내가 JTBC 뉴스를 시작한 지 꼭 한달 만이었다. 훗날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지면서 삼성과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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