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권력과 언론에 물음 묻기
─ 비판적 질문을 찾아서
일기장과 권력의 야만성
“왜 일기장을 선생님께 검사받아야 해요?”
독일에서 유아원을 그리고 미국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간 나의 아이가 묻던 질문이다.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일기 숙제를 할 때마다 아이는 이 질문을 했다. 한국어보다는 영어로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아이가 영어로 먼저 일기를 쓰면 내가 한국어로 번역하고, 아이는 그것을 제출할 일기장에 옮겨 쓰곤 했다. 매일 저녁 해야 했던 이 숙제는 아이에게 지독하게 ‘부당한 것’이었다. 일기란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아이에게, 일기가 선생님께 제출하고 도장 받는 숙제라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저런 설명을 억지로 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아이를 이해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두 살 때 한국을 떠나 독일과 미국에서 공교육을 받고 돌아온 아이에게 ‘일기 제출 숙제’는 자신이 한국에서 경험하는 ‘부당한 것’들 중 하나였다.
왜 일기장을 제출해야 하는지 아이가 학교에서 질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숙제’라고만 했고, 반 아이들도 “바보같이 그것도 몰라? 그게 숙제니까 내야지” 하며 놀렸다고 한다. 그동안 ‘왜’로 시작하는 무수한 질문을 해 오던 아이는, 점점 한국 학교는 질문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숙지한 듯했다. 항의성 질문은 집에서만 하기 시작했다.
‘왜’ 일기를 숙제로 내야 하는가, ‘왜’ 운동장에서 한 학년 높다고 학년이 낮은 아이의 공을 마구 빼앗는가, ‘왜’ 다른 아이가 잘못했는데 반 전체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아이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내 아이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폭력적인 일’이었다. 아이의 입에서 “여기는 나를 사람 취급 안 해”라는 말이 나오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학교는 ‘교육 권력’을 가지고, 운동장의 아이들은 ‘학년 권력’을 가지고, 도처의 어른들은 ‘나이 권력’으로 한 아이 사람이 고유한 ‘인격적 존재’임을 부정한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 사람은 스스로 표현은 못 했지만, 나는 “나를 사람 취급 안 해” 하던 한 아이 사람의 경험과 일기 숙제에 항의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일기장 압수,
그 권력의 야만성
2019년 8월 9일 이후,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소위 ‘조국 사태’와 관련해 무수히 쏟아진 기사 중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일기장 압수’이다.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집을 11시간 동안 수색하면서 조 전 장관 딸의 일기장을 압수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쓰던 일기장까지 압수하려 했지만,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기만을 압수해갔다고 한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법 집행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지독한 야만의 모습을 보았다. 혹자는 ‘그까짓 일기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기장 압수’가 내게는 ‘사람 취급하지 않는’ 법 집행 권력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드러낸 단면으로 보였다.
일기란 무엇인가.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일기를 쓴다. 한 인간이 스스로 ‘개체성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일기란 자기 자신과 나누는 가장 사적인 대화이다. 일기의 유일한 독자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의 일상사를 기록하기도 하고, 복잡한 상념을 정리하기도 한다. 또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고, 자신만의 고민과 딜레마를 적기도 하는 공간이다. 일기에는 사실적 표현, 상징적 표현 또는 특정한 정황을 알아야만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표현도 있다. 객관적 정보만을 기록한 ‘일지’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일기란 개별인으로서 한 인간의 고유한 존재방식이다.
무슨 엄청난 국가적 반역죄라도 저지른 사람인가. 법 집행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지극히 사적인 일기까지 압수한 후, 그 일기를 어떻게 소비했을까. 일기장에 나오는 글귀에서 혹시나 자신들이 이미 구성한 틀에 들어맞는 단서라도 있을까 하여 여러 사람이 번갈아 돌려보았을 것이다. 마치 조립된 장난감을 뜯어내듯, 한 사람의 내적 세계를 담은 글들을 조각내 분해했을 것이다. 법 집행 권력의 야만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 집행 권력이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모든 사건에 대하여 공평하게 행사되어야 한다. ‘선별적 법 집행’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집행 과정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인간 존중 정신을 기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조국 전 장관 딸의 고등학교 일기장까지 압수하는 그 법 집행은 공평하지 않고 인간 존중 정신이 없는 폭력적 권력 남용이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올바른 사용은
인간 존중을 위해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에 입법을 권고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지금까지 7차례나 추진되었지만, 이제껏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기독교 단체들이다. 2020년 6월 29일 이 법이 다시 발의되자마자, 예상대로 수백 개가 넘는 기독교 단체들이 결사적으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동성애 옹호법’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기독교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들조차도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목회자들이나 신학대학생들을 ‘이단’ 또는 ‘범죄자’ 취급하면서, 포괄적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종교 권력’이 어떻게 그 야만성을 드러내면서, 성소수자는 물론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보여준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세운 첫 ‘죽음의 강제수용소’라고 알려진 오스트리아 린츠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수용소 박물관에 전시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내 시선을 멈추게 한 사진이 있었다. 수용소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이 독일군을 죽여 발가벗긴 주검에 나치 문양을 새기고, 온몸에 상처를 내어 수용소 철조망에 X자로 시체를 걸어 놓은 사진이었다. 철조망 위 독일군의 시체 사진은 그가 어떤 끔찍한 죽임을 당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연합군의 승리 후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이한 ‘과거 피해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현재 가해자’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나치 시대의 피해자였던 유대인 집단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것과 같다. ‘과거 피해자’들이 권력 집단을 구성하게 될 때, 그 ‘과거 피해자 집단’이 ‘현재 가해자 집단’으로 전락하곤 한다. ‘과거 피해자성’을 현재 타자들에 대한 폭력과 야만성을 정당화하는 담보로 삼는 경우이다.
베르나르-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는 그의 책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권력의 야만성’에 대하여 예리한 분석을 한다. 그의 분석은 권력을 가지게 된 이들이 어떻게 권력의 우지와 확장 그리고 절대화를 위하여 폭력적 ‘야만성’을 드러내는가를 보여준다. “권력 없는 사회는 없고, 남용 없는 권력은 없다”는 레비의 말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다층적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구한다.
‘권력’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권력을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누구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권력의 기능은 천차만별이다.
우리의 일상 세계에서 법 집행 권력, 교육 권력, 종교 권력, 과거 피해자 권력, 젠더 권력, 재벌 권력, 언론 권력 등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양태의 권력이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권력의 야만성은 한 사람의 삶을, 가족의 삶을 그리고 모두의 인간됨을 파괴하고 짓밟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얼굴을 한 권력의 야만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여타의 권력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 ‘추상적 인간 존중’이 아니라, ‘얼굴’을 가진 개별인으로서 ‘인간 존중’이다. ‘얼굴이야말로 윤리가 시작되는 자리’라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기장’이 상징하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인들의 ‘개체성’이며, 고유한 ‘얼굴’이다. 그 개체성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취급하는 권력은 어떤 양태의 권력이라 해도 야만화된 집단 권력으로 전락한다. 모든 권력이 무엇보다도 한 개인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권력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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