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객관과 편견 사이
― 성폭력 재판에서 ‘법’은 왜 자꾸 실패하는가
법은 정말 공정한가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2018년 5월 16일 청와대 국민청원 최다 추천을 받은 청원 글의 제목이다. 5월 11일에 시작된 청원은 닷새 만에 35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발단은 홍익대학교 누드크로키 수업에서 발생한 남성 모델에 대한 불법촬영 사건이었다. 여성인 범인은 사건 발생 일주일여 만에 검거됐고, 조사 결과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어 구속 수사를 받았다. 여론이 들끓었다. 피해자가 남성이라 신속히 처리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였다. 5월 19일에는 서울 대학로에 모인 1만 2,000여 명의 참가자들에게서 “동일범죄 동일처벌”, “남자만 국민이냐 여자도 국민이다”라는 구호들이 터져나왔다.
경찰이 발 빠르게 대응한 것은 피해자가 남성이어서라기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다 보니 ‘특별하게’ 취급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경찰의 수사력은 ‘때마침’ 제대로 발휘됐고, 범인은 신속하게 검거됐다. 그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수사기관은 문제 제기에 당황스럽거나 억울했을 수도 있다. ‘이게 성차별이라고?’라며 의아해할 수도 있다. 이주민 서울지방경찰청장 역시 5월 1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성별에 따라 수사 속도를 늦추거나 빨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피의자 구속 역시 ‘온라인상 유포’라는 죄질의 위중함과 증거인멸의 정황에 바탕한 것이다.
청와대 청원 글에 서명하고 직접 집회에 나선 여성들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들이 차별이라고 외치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그간 절박함과 상대적 박탈감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처리 속도와 결과에 여성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는 여성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조계는, 또 사회는 유사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그간 대부분의 불법촬영 사건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2018년 경찰청이 제출한 국정감사자료 「2014년 이후 카메라 등 이용촬영 범죄현황」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불법촬영 피의자는 5,437명이었는데 그중 남성이 5,271명이었다. 2016년에는 전체 피의자 4,491명 중 4,374명이 남성이었다. 이들 중 30퍼센트가 조금 넘는 사건들만 기소가 진행되었다. 피의자가 구속된 경우는 2017년 119명, 2016년 135명이었다. 해마다 불법촬영 관련 사건은 계속 급증했지만, 기소조차 쉽지 않았고 구속된 피의자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구속률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그간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처벌의 강도가 약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검찰청 2017 범죄분석」에 따르면 2016년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범죄로 범인이 검거된 사건 5,249건 중 기소된 사건은 1,716건이며, 이 중 구속된 사건은 154건에 불과했다.
불법촬영에 대한 피해와 상처가 심각한데도 그에 상응할 만한 수준으로 기소와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국민청원은 그 불만이 누적돼 나타난 반응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다분히 심각한 문제다. 불법촬영에 대해 수사 지휘를 하는 검찰은 압수 수색을 철저히 진행하지 않는다. 법원도 위중하게 처벌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경찰이 검찰과 법원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란 쉽지 않다. 결과는 물론이고, 이 과정 자체가 피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이자 불만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 고소 대리를 맡았다. 가해자는 준강간이 아니라면서 성관계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합의하에 한 성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당시 만취 상태였고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피해자는 준강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보다, 자기도 모르는 불법촬영 영상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법원에 제출된 게 불법촬영 영상의 전부인지, 혹은 이미 암암리에 다른 곳으로 유포된 것은 아닌지, 앞으로 동영상이 유포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두렵다고 했다.
나는 변호인으로서 검찰에 불법촬영 압수 수색을 요청했다. 검찰의 답변은 당황스러웠다. 비록 몰래 찍은 영상이지만 영상물의 소유권이 가해자에게 있기 때문에 압수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경찰이 불법촬영에 대해 기소 의견 송치를 했지만, 그 영상물이 불법촬영물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소가 결정된다고 해도 압수나 수색을 해줄지도 알 수 없다. 가해자가 불법촬영 영상을 자발적으로 제출했고, 이를 유포하다가 적발된 것이 아니므로 구속을 검토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가해자가 그 영상을 유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유포됐을 시 피해자가 입을 피해는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촬영물이 일파만파 퍼질 때까지는 도움받을 길이 없고, 실제 피해가 발생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을지, 아니 처벌이나 받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현실이 이러니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내재된 불안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다.
2018년에는 모델로 일하며 각종 성폭력과 원하지 않는 촬영을 강요받고, 심지어 그 촬영물이 유포된 피해 여성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 대개는 계약서와 촬영 횟수 등을 내세우며 합의된 촬영이었음을 강조했고, 유포는 모르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계약서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가해자의 권리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고, 절대적인 을의 지위에서 사인했을 피해자의 입장은 감안하지 않고 해석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수사가 본격화되면 피해 영상은 거꾸로 피해자들이 당시 동의하여 촬영했다는 증거라며 제출될 것이 뻔하다. 수치스러운 촬영을 요구받았던 피해자들은 이제 그 촬영물이 피해를 부정하는 증거로까지 제출되고 사용되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촬영물이 빠르게 유포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촬영물이 유통되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을 범죄로 의율擬律, 법원이 법규를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하는 것할 수 있을지는 현행 법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요원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촬영을 하거나 유포하는 행위가 얼마나 나쁜지,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간 한국 사회가 불법촬영 피해를 당한 이들을 얼마나 무심하게 대했는지를 보여준다. 관련 법규를 재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미 있는 수사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죄질에 맞게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법을 만들고 아무리 처벌의 상한선을 강하게 정해놓아도, 적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변호사이기에 앞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이런 사건 앞에 서면 말 그대로 속이 터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5월 14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불법 촬영 범죄에 대한 수사관행이 느슨하고, 단속하더라도 처벌이 강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지적하며 수사기관의 인식과 관점의 전환을 요청했다. 관련 법규를 재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나 중요한 건 이미 있는 법과 수사력을 이번 사건처럼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범죄도 사람이 저지르지만, 단죄하는 것도 사람이다. 법 적용의 한복판에 사람이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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