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여성들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 김인영
손수현 배우님께
날이 따뜻해지고 봄꽃이 만발하나 싶었는데 급한 봄비로 다 져버려서 아쉬웠어요. 그나마 떨어진 잎들이 봄 길을 만들어주어 조금은 위로가 되는 오늘입니다. 잃어버린 일상이 그립고 많은 것이 급변해 적응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 요즘 어수선한 시국에 맞은 두번째 봄.
수현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존경하는 정세랑 작가님이 보내신 편지를 받고 벅찬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다른 여성에게 답장을 이어가야 했을 때 제일 먼저 수현씨 생각이 났습니다. 근 몇년간 열정적인 업계 동료로, 다정한 동네 친구로, 먼저 채식주의를 실천한 삶의 선배로, 제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수현씨이기 때문입니다.
수현씨를 처음 만난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많이 지쳐 있었고 제 감정들은 닳아 있었어요. 저작권을 침해당하고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저와 동료들은 회사의 내부고발자가 되었고, 새로 팀을 만들어 독립했지만 맨몸으로 부딪힌 업계는 여성 창작자에게 정말 가혹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여성 메인 음악감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나의 창작력을 어필해 일을 따내어야 하는 상황은 정말 고됐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독이 되어 나를 할퀴어대 휘청거리던 즈음에 우리는 주연배우와 음악감독으로 한 작품 안에서 만났습니다. 물론 그 작품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았으나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은 한참 뒤지요. 작품이 끝난 후 수현씨가 여성인권과 동물권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걸 지켜보면서 저런 멋진 사람과 일을 같이 했는데 친구가 될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 아까웠어요. 용기를 내서 차 한잔하자고 연락한 그날의 제가 참 기특합니다. 나와 이상이 맞는 친구를 새로 사귀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살던 제게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인연이 생겼으니까요.
지난 겨울 우리는 함께 유기견 보호소인 ‘더봄센터’에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채식을 실천하는 모임 친구들과 함께였어요. 우리는 그곳에서 동물보호 시민단체 ‘동물권행동 카라’의 대표이자 영화계의 큰언니 같은 여성, 임순례 감독님을 만났습니다. 언제 뵈어도 늘 놀라움을 안겨주는 분이죠. 수현씨에게 편지를 쓰려고 앉으니, 우리의 공통 관심사인 동물권과 영화 현장에서 앞서서 거친 길을 헤쳐온 그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2014년, 동물권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던 시기. 경기도 고양시의 어느 개 도살장에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개들을 위해 추모사를 읽고 계시는 임 감독님을 처음 뵈었어요. 저는 어린 시절 가슴 저려하며 보았던 음악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만든 임순례 감독님이 동물단체의 대표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게 그는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여성감독으로는 두번째 최다 관객수인 400만 스코어를 기록한 거장이었고, 「제보자」2014 「남쪽으로 튀어」 2012 같은 정권 비판, 사회 고발성 영화부터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과 같은 직접적인 동물 관련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을 만들어낸, 거침없고 힘이 넘치는 여성 창작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진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작업들을 해오면서 동물단체 활동까지 하시는 건지 그 에너지에 늘 감탄하고는 했죠. 동물보호 관련 현장이 아닌 곳에서도 그분을 볼 수 있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패한 정권을 향해 영화로 직구를 던지고,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영화계 미투 공작설이 돌던 참담한 시기에 청중을 장악하는 카리스마로 피해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약자들과 연대하는 곳에는 늘 그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창작자들을 착취하는 전 회사를 보이콧하며 악순환을 끊어달라고 업계에 호소했을 때, 임순례 감독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꼭 기억하겠으며 당신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고용할 힘을 가진 사람들이 힘없는 창작자들의 편에 서줘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가진 힘과 정성을 선한 일에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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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을 위해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여성 창작자들과 연대하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수현씨를 볼 때면 임순례 감독님과 많은 부분이 겹쳐집니다. 특히 임 감독님의 최근작인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는 요리 장면이 주를 이루는데 편의점 도시락이 나오는 씬 외에 단 한 장면에도 고기가 등장하지 않아요. 심지어 촬영에 쓰인 송충이 한마리까지 안전하게 나무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3년 전, 일상에서 내가 채식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 선뜻 도와주겠다며 음식을 나누어주고 채식주의 식당과 제품을 공유해준 수현씨 덕에 저는 채식을 시작했어요.
저작권 분쟁 후 작업 의뢰가 끊기고 앞으로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 기다리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사람도 수현씨입니다. 선택을 받아야만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제게, 수현씨의 말은 눈을 새로 뜨게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본인이 출연할 영화를 만들었고 저는 음악과 함께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영화 번역 일을 시작했어요. 여성들이 서로를 독려하고 끌어줄 때 발휘되는 힘은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잘했다고 더 많이 말해줘야 합니다. 여성은 쉽게 공격당하고 폄하되고 통과하기 힘든 벽을 늘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저는 생명을 중히 여기고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인권과 평등이 발현된다고 믿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힘은 단단하고 오래갑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이들이 견고한 유대를 이어나갈 때 더 많은 여성들이, 생명들이 ‘살게’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현씨께 당신은 잘하고 있다고 전부터 말해주고 싶었어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참 멋지다고, 대단한 여성이라고, 존경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계속해서 연기해달라고,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우리처럼 서로 의지하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흉흉한 세상이지만 오늘도,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보았으면 해요, 우리.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2021년 4월
음악감독 김인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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