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낡은 차가 덜컹거리며 오르막 흙길 앞에 멈춰 섰다. 끊겨 있는 나무 계단, 낡은 이정표와 부서진 난간들. 한때 국립공원이었던 이곳은 이제 인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흩어진 자갈과 바위만 가득했다. 길 양옆의 고무나무들은 줄기 표면이 까맣게 변했고 발톱에 긁힌 듯한 겉면에 말라붙은 수액만 섬뜩한 흰색이었다. 아래로 축 늘어진 야자 잎들은 어두운 잿빛으로 죽어 있었다.
“돌핀을 가지고 있었으면 저 안쪽까지는 올라갈 텐데.”
무심코 중얼거리다 나오미는 아마라의 눈치를 보았다. 좌표를 얻기 위해 자매가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호버카를 넘기고 와야 했다. 좌표 하나에 호버카를 요구할 줄은 몰랐기에, 나오미는 화들짝 놀라 아마라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이번에는 그냥 가자고, 좌표 같은 건 다른 데서 구할 수도 있다고. 그 순간 아마라의 지친 표정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표정을 보자 다음번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라에게 더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고작 좌표가 입력된 작은 카드 한 장을 위해 호버카를 넘겨준 건 그래서였다.
아마라가 잘 보이지 않는 숲 안쪽 길을 가늠하면서 말했다.
“길이 좁아서 어차피 호버카로도 못 갔을걸. 이 커다란 나무들을 다 박살 내고 갈 게 아니라면, 도중에 버려야 했겠지.”
“글쎄. 돌핀을 저 위로 띄우면 됐을지도……”
나오미가 그렇게 말하며 위를 보았다. 키 큰 나무들이 시야에 가득찼다. 일곱 살 때까지 살았던 이르가체페에서도 이렇게 높은 나무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공중 운행이 가능한 호버카였던 만큼 나무 위로 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아마라가 고개를 저었다.
“공중 운행은 기술이 필요해. 우린 돌핀을 높이 띄워본 적이 없잖아. 그리고 띄웠어도 고생했을걸.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투 드론을 얼마나 많이 마주쳤는지 생각해봐. 자꾸 그런 걸 날려보내는 멍청한 돔 시티 녀석들 덕분에 푼돈 벌이는 됐지만, 돌핀에 탄 상태로 저렇게 높은 곳에서는 승산이 없었을 거야. 추락하지 않게 붙들고나 있으면 다행이었겠지.”
나오미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아마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이제는 손을 떠나버린 호버카 이야기를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돌핀’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애지중지했지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나오미는 나무 계단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흙이 말라 있어. 비가 오랫동안 안 왔나봐.”
수년간 더스트가 증식하며 기후도 엉망이 되었다. 바람도, 구름도 예측 불가능했다. 몇 달 사이 더스트 농도가 짙어지면서 말레이반도 남부에 가뭄이 이어졌다. 바싹 마른 흙으로 보아 원래 열대우림이었던 이 숲도 지금은 건조해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살기에는 더 좋을지도 몰라. 밀림에서는 끊임없이 퍼붓는 폭우가 땅의 양분을 다 가져간다고, 그래서 이미 치열하게 싸워서 자리잡은 것들 외에는 자라기 힘들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폭우도 없고 자리잡은 것들도 다 죽은 숲이라니,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잘된 일 아니겠어? 방해하는 게 하나도 없는 셈이니까.”
아마라는 말이 많았고, 평소보다 불안정한 것 같았다. 스스로를 애써 설득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쪼그려앉은 상태로 나오미가 아마라에게 물었다.
“언니는 정말 그곳이 있다는 걸 믿어?”
“너도 봤잖아. 그건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냐.”
나오미는 아마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다. 좌표 카드를 넘겨준 내성종들이 증거라고 내민 사진이 있었다. 숲속 한가운데에 환히 밝혀진 불빛, 그리고 살아 있는 듯한 식물과 사람들. 아주 먼 공중에서 촬영한 것을 확대한 듯 흐릿했지만, 아마라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나오미는 그런 사진 같은 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더스트 폴 이전에 찍은 사진을 마치 멸망 이후처럼 어둡게 칠하면 그만 아니냐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마라의 표정이 너무 불안해 보여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쫓겨난 내성종들 사이에서 돌고 있는 기이한 소문이 있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케퐁 지역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두 시간쯤 차를 타고 달리면, 도피처가 위치한 숲이 나온다고. 그 도피처는 지하에 감춰져 있거나 돔으로 덮여 있지 않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을 그대로 맞으며 더스트 이전의 마을처럼 그저 놓여 있는데, 내성이 없는 사람들도 그곳에서는 멀쩡히 살아간다고.
소문을 들은 이후 아마라는 우연히 내성종들을 만날 때마다 도피처의 위치를 캐물었다. 나오미는 도피처의 존재에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더스트로 가득한 이 대륙 위에 그런 날것의 도피처가 존재한다는 걸까. 물론 나오미는 언니가 돔 바깥의 도피처를 찾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마라는, 나오미와는 다르니까. 나오미와 달리 아마라는 이 공기에 취약하니까.
나오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짓단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래. 안쪽으로 가보자.”
더스트가 휩쓸고 간 숲은 죽음 같은 적막으로 덮여 있었다. 야생동물은 물론이고,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수북히 쌓인 낙엽 더미에 발이 푹푹 빠져 들었다. 땅 위로 드러난 거대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나오미는 아래만 보고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는데도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빼곡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점점 어두워졌다.
“잠깐.”
아마라가 나오미를 팔로 막아 멈춰 세웠다. 몇 걸음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이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나오미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마라가 말했다.
“저건…… 오랑우탄이야.”
거의 성인 덩치만한 오랑우탄이 죽어 있었다. 더스트로 인해 부패가 멈췄는지 형체가 그대로였다. 나오미는 랑카위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동물들의 사체를 몇 달간 상자에 방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어떤 것은 아주 빨리 썩어버렸고 또다른 것은 박제한 것처럼 썩지 않았다. 나오미가 오랑우탄 사체를 향해 팔을 뻗자 아마라가 얼른 그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 뭐가 옮을 줄 알고?”
하지만 나오미는 다시 손을 내밀어 오랑우탄을 만져보았다. 손 끝에 살짝 닿은 털은 차가웠고, 또 피부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위쪽에는 부패의 흔적이 거의 없었지만 땅과 맞닿은 아래는 썩어 있었다. 혹시 흙에는 더스트로 죽지 않은 미생물이나 벌레들이 살고 있는 걸까.
“조심 좀 해. 내성이 널 모든 더러운 것들로부터 지켜주지 않아.”
나오미는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사체와 바닥을 살폈다. 기묘한 점이 한 가지 더 눈에 띄었다. 오랑우탄의 넓적다리 일부분이 손바닥만한 잎을 가진 덩굴식물로 뒤덮여 있었는데, 마치 오랑우탄이 죽은 이후에 자라난 것 같았다. 나오미가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걸까?”
“오랑우탄이? 넌 이게 어딜 봐서……”
“아니, 이 식물 말하는 거야.”
아마라는 나오미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오미는 좀더 가까이서 식물을 들여다보았다. 더스트로 죽은 식물들 중에도 썩어 분해되지 않는 것이 많아서, 눈으로는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덩굴 잎 하나를 떼어내려는데 닿은 살갗이 따끔거렸다.
문득 나오미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여긴 흙이 축축해. 입구와는 달라.”
공기중에서 갑자기 습기가 느껴졌다. 조금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오미는 퍼뜩 놀라 아마라를 보았다.
“괜찮아?”
안개가 숲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라 역시 안개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스트 안개일까? 하지만 나무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갑자기……”
아마라의 중얼거림에 나오미도 불안해졌다.
“그건 상관없어. 바람은 위에서도 불고, 더스트는 어디로든 갈 수 있잖아. 이상한 게 느껴지면 바로 말해줘, 언니.”
좀처럼 더스트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나오미와 달리 아마라는 더스트 증식의 신호에 민감했다.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붉은 안개는 대표적인 증식 신호였다. 랑카위의 연구원들도 그것이 일종의 ‘지표’라고 말했다. 왜 갑자기 더스트 안개가 나타난 걸까? 정말로 이 숲에는 뭔가 있는 것일까?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멜바의 내성종들이 알려준 건 숲의 입구뿐이었다. 그들은 숲 안쪽으로, 깊은 곳으로 계속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애초에 ‘그곳’이 정말로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속인 거라면 어떡해야 할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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