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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가 이겼을 때, 전장에는 그녀 혼자 서 있다.
피가 머리카락에 번들거린다. 내뿜은 숨결은 이 죽어가는 세계의 마지막 밤에 증기처럼 이글거린다.
이번엔 꽤 재미있었어. 레드는 속으로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꼴을 갖추는 사이에 시들해진다. 그래도 깔끔하기는 했다. ‘시간의 실’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혹시라도 살아남아 에이전시가 마련해 놓은 여러 미래를 헝클어뜨리는 자가 한 명도 없도록 이번 전투에서 전멸시켰으므로. 그 미래들은 에이전시가 지배하는 곳이자 레드 자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레드는 역사에서 이 가닥을 매듭지어 녹아내릴 때까지 그슬리러 왔다.
레드는 한때 인간이었던 것의 잔해를 붙잡는다. 두 손을 그것의 뱃속에 파묻고서, 손가락으로 합금 등뼈를 움켜쥔다. 레드가 손을 놓자 부서진 외골격 장갑이 돌 위로 떨어져 철컹거린다. 조잡한 기술, 케케묵은, 청동으로 열화우라늄에 맞서다니. 이 남자에게 기회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것이 레드의 특기이다.
임무가 끝난 후에 찾아드는 고요는 장대하고 궁극적이다. 레드의 무기와 장갑은 황혼 녘에 오므라드는 장미 봉오리처럼 그녀 안으로 접혀 든다. 펼쳐진 모조 피부가 자리를 잡아 치유를 끝내고 프로그램식 재질의 의복이 원형으로 복구되면 레드는, 다시금, 여성 비슷한 존재로 보인다.
레드는 전장을 서성이며, 돌아보며, 확인하다.
이겼다. 그렇다. 그녀가 이겼다. 레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뻔한 결과이지 않은가?
양측 군대 모두 죽어 널브러져 있다. 거대한 두 제국이 이 땅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서로가 서로의 뱃전에 암초가 되어. 그것이야말로 레드가 이곳에 온 목적이다. 두 제국의 잿더미에서 다른 이들이 일어설 것이다. 에이전시의 목표에 더 걸맞은 이들이. 그럼에도.
전장에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레드의 발치에 수북이 쌓인, 시간에 속박당하는 저 시체들과 같은 신세인 비천한 구경꾼이 아니라, 진짜 배우가 있었다. 누군가 저쪽 편에서 온 자.
레드의 동료 요원 가운데 그 적의 존재를 감지한 이는 드물 것이다. 레드가 알아차린 까닭은 그저 참을성이 있고, 고독을 즐기고, 주의가 깊기 때문이다. 레드는 이날의 전투를 복기한다. 머릿속에서 형상화하여 뒤로, 다시 앞으로 재생한다. 전투함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던 순간을, 구명정이 당연히 폭발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던 순간을, 집중포화가 신호보다 30초 늦게 쏟아졌던 특정한 순간을, 레드는 눈치챈다.
두 번은 우연이다. 세 번은 적의 작전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곳에 온 목적은 완수했다. 레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원인과 결과로, 또한 예측 불가능한 미래를 예측하는 계산으로 가득하고, ‘시간 전쟁’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오늘 레드의 손을 물들인 저 흥건한 피보다 어쩌다 살려 둔 목숨 하나가 저쪽 편에는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도망자는 나중에 여왕이 되거나 과학자가 되거나, 심지어는, 시인이 되는 수가 있다. 간혹 그 도망자의 자식이, 아니면 어딘가 먼 곳의 우주 공항에서 도망자와 겉옷을 바꿔 입은 밀수꾼이, 그 운명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면 오늘 흘린 피는 모두 헛수고가 된다.
죽이는 일은 연습을 거듭할수록 힘을 쓰는 방식과 기술 면에서 더 쉬워진다. 죽임을 당하는 일은, 적어도 레드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동료 요원들은 레드처럼 느끼지 않거나, 감정을 숨기는 데에 더 능숙하다.
이렇게 같은 시간대에 같은 전장에서 레드와 맞붙는 것은 가든의 전사들답지 않다. 비밀리에 확실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그 전사들에게는 더 어울린다. 그러나 이런 짓을 할 법한 자가 한 명 있다.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레드는 그녀의 존재를 안다. 전사들은 저마다 특징이 있다. 레드는 대담함과 무모함이 남긴 흔적을 알아본다.
어쩌면 착각인지도 모른다. 레드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레드의 적은 이런 식의 신기한 속임수를 즐기는 모양이다. 레드가 빚어낸 장대한 살육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철저히 망쳐버리는 짓을. 그러나 의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레드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주검이 즐비한 승전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패배의 씨앗이 있는지 찾아본다.
미세한 진동이 흙 속으로 퍼져나간다. 땅이라는 이름은 걸맞지 않다. 행성은 죽어가는 중이다. 귀뚜라미가 운다. 귀뚜라미들은 살아 있다. 당분간은, 이 바스러져 가는 평원 위에 산산이 부서진 전함과 갈가리 찢긴 주검들 사이에서, 은빛 이끼가 강철을 갉아먹고 보랏빛 꽃이 파괴된 대포의 목을 조르듯 포신을 친친 감은 채 만개한다. 행성이 웬만큼만 오래 버텨 준다면 저 주검들의 입에서 뻗어 나온 덩굴에도 열매가 맺힐 것이다.
별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열매 또한 맺히지 않을 것이다.
초토가 된 대지 위에서, 레드는 편지를 발견한다.
전쟁터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여기저기에 있어야 할 것은 한때 별 사이를 오가던 전함의 잔해 사이로 쌓인 주검들. 이곳저곳에 있어야 할 것은 죽음과 흙먼지와 성공한 작전의 결과로 뿌려진 피. 저 하늘에 읽어야 할 것은 허물어져 가는 달 여러 개, 그리고 궤도에서 불타는 전함들.
그런데 이곳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크림색 편지지에, 구불구불 이어진 흘림 글씨로, 오로지 이 한 줄만이 적혀 있다.
읽기 전에 태워 버릴 것.
레드는 느끼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집착이다. 이제 그녀는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조바심도.
레드의 직감은 옳았다.
레드는 자신을 쫓는 사냥꾼의 그림자를, 자신이 쫓는 사냥감의 그림자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가청 범위를 벗어난 저주파와 초음파를 모두 듣는다. 레드는 만남을, 새롭고 더 보람 있는 전투를 갈망하지만, 오직 주검과 잔해와 적이 남긴 편지만이 레드와 함께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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