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삼림헌장
그 장면을 상상해보라. 1217년 11월 6일, 축축하고 추운 아침 런던에 있는 옛 세인트폴성당에서 열 살의 국왕 헨리 3세는 섭정이자 로마 교황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추기경인 삼촌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2개 문서에 인장을 찍었는데, 각각은 우아한 라틴어 글씨가 가득한 한 장짜리 커다란 양피지였다. 소년왕은 아마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었다.
이 양피지 가운데 하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각국의 헌법과 인권 보호를 위한 영감이 된다. 이것은 자유대헌장Magna Carta Libertatum으로, 1215년 6월 15일 국왕 존이 템스강 옆에 있는 러니미드의 목초지에서 귀족들의 강압하에 승인함으로써 생명을 얻었지만 국왕 자신과 교황에 의해 신속히 폐기되었다. 그리고 1217년 11월의 그날 약간 축소된 형태로 부활해 마그나카르타가 되었다.
두 번째 문서는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승인될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삼림헌장Charter of the Forest 혹은 카르타 데 포레스타Carta de Foresta로, 영국 법령집에서 그 어떤 법률보다 오래 유지되다가 754년 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삼림헌장이 공포된 이후 수세대 동안 잉글랜드의 모든 교회는 매년 네 번―크리스마스, 부활절, 여름의 성 요한 축일, 가을의 성 미카엘 축일―공개적으로 이 헌장의 전문을 낭독해야 했다. 삼림헌장은 그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1297년 국왕 에드워드 1세는 헌장을 승인함으로써 삼림헌장과 마그나카르타가 이 나라의 보통법common law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오늘날 삼림헌장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으며 이를 들어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2015년 영국 정부는 마그나카르타 사본을 내용 설명문과 함께 2만 1천개에 달하는 모든 국립 초등학교에 보내라고 지시했지만 삼림헌장은 해당되지 않았다. 삼림헌장은 어렵게 읽어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영감을 주었지만 거기 담긴 모범적 가치와 원칙은 수세기에 걸쳐 군주, 엘리트, 정부에 의해 오용되었다.
이 장은 삼림헌장의 등장과 그것이 거쳐온 험난한 역사를 그것의 가치 혹은 에토스와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삼림헌장은 원시적이고 이상화된 자연 상태의 보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삼림헌장은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고, 공유지 속에서 협력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공유화’에 관한 것이며, 공동자원을 이용하고 관리는 공유자들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역사 속의 삼림헌장: 1217년에서 1971년까지
삼림헌장은 짧아서 겨우 17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가 양피지 하나에 담겨 있다. 오늘날 삼림헌장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핵심어와 개념 가운데 많은 것이 역사 속으로 흩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당시에, 그리고 이후 수백 년간 아주 정확한 의미와 목적을 가진 것들이었으므로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삼림헌장이 포착하고 있는 가치는 영원하다.
삼림헌장은 원래 자유대헌장에서 나왔다. 이 1215년판 자유대헌장은 “숲과 관련한 모든 사악한 관습”을 중지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그 사악한 관습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마그나카르타가 된 1217년 판본에서는 이 조항 및 다른 몇몇 조항이 삭제되어 1215년의 63개조에서 47개조로 줄어들었다. 그 사악한 관습을 규정하고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히는 것은 삼림헌장의 몫이 되었다.
‘숲’의 어근은 ‘금지된’forbidden과 동일하며, 라틴어 포리스foris는 ‘외부’outside를 뜻한다. 이것은 13세기 숲의 의미에 반영되어 있는데, 군주가 자신의 목적대개 사냥을 위해 전용한, 따라서 공유자들이 공유토지에 들어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를 부정당한 토지 구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숲의 개념은 나무가 있는 넓은 공간을 가리키는 현대적 용법이 함축하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없는 헤더와 가시금작화 서식지 다트무어와 엑스무어도 삼림헌장에서 말하는 ‘숲’의 일부였다. ‘숲’은 전야田野와 심지어 농장 및 마을도 포함할 수 있었다. 역사생태학자 올리버 래컴은 중세에 숲으로 간주된 토지의 절반만이 나무가 있는 구역이었다고 추정했다.
어느정도는 삼림헌장을 ‘자유민’으로서 공유지의 권리 혹은 관습적 권리를 주장하는 공유인 남성과 여성 및 이들을 대표한 사람들이 국가에 제기한 최초의 계급 기반 요구의 산물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그나카르타와 마찬가지로 삼림헌장은 당시 인구의 3분의 1인 농노의 권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수는 이후 3세기에 걸쳐 줄어들었으며, 1575년 엘리자베스 1세가 얼마 안 남은 이들을 해방시켰다‘농노해방’. 그리고 삼림헌장은 마지막 조항에서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해야concessimus omnibus 한다고 밝힘으로써 보편주의 원리의 도래를 알렸다.
삼림헌장은 계급 기반의 진보였기 때문에 종종 공유인common man의 헌장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진정으로 급진적인 문서로서 자유민에게 생계수단에 대한 권리, 원자재에 대한 권리, 제한적이지만 실질적인 수준의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를 보장했다.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유일하게 삼림헌장은 이를 통해 ‘일할 권리’the right to work라는 관념에 실질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나중에 이는, 예를 들어 세계인권선언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노동에 대한 의무a duty to labour 정도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빈민들은 20세기 사회주의자들이 망각했던 중요한 자유인 장기간 ‘고용’ 대신 하루 단위로 고용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나라의 역사를 살펴볼 때 삼림헌장은 환경과 관련된 첫번째 법령이기도 하다. 삼림헌장은 자연자원의 이용에 대해 절대적 한계를 부여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원을 재생산하고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삼림헌장은 자연자원의 이용에 대한 기준, 즉 환경권의 핵심적 속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 책의 3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현대에 들어와서 심하게 남용되었다. 다른 권리들을 넘어 토지 이용에 우선권과 독점권을 주는 것은 삼림헌장에 맹아적 형태로 담겨 있는 원칙에 위배된다.
삼림헌장은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도 첫번째 진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페미니스트 헌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마그나카르타의 수정된 제7조에 담겨 있으며, 삼림헌장에도 똑같이 들어 있다. 새로운 제7조는 과부에게 재혼을 거부하고, 남편의 토지 일부를 보유하며, 공유지에 대해 합당한 수준의 에스토버estovers, 즉 생계수단을 얻을 권리를 주고 있다. 실제로 과부는 기본소득의 권리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여성이 가축과 비슷한 취급을 받던 당시로서는 주목할 만한 진전이었다. 심지어 국왕 존은 자신의 나이 든 아내를 어떤 남작에게, 그가 꺼려했음에도 팔기도 했다. 그는 이 특권에 대해 돈을 내야만 했다.
이런 권리들을 뒷받침한 것은 인클로저한 토지를 공유자에게 돌려주고―‘폐림廢林’하고―이후 더 이상 토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군주에게 부과된 의무였다. 근본적으로 삼림헌장은 ‘재산 없는’ 사람들을 위한 선언이었다. 더 나아가 삼림헌장은 공유권comon rights을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배상을 해준 것이다. 또한 삼림헌장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 혹은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사람들에게 피난처로서의 공유지 혹은 숲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지속적인 시민들의 투쟁과 영국 역사에서 가장 미움받은 군주 가운데 하나인 존 왕의 비행이 있은 이래 삼림헌장은 엘리트와 국가에 의한 공유지 약탈에 맞섰다. 공유지의 약탈은 20세기와 21세기 초에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불시에 벌어졌다. 1086년 둠스데이북에는 25군데의 왕실 숲이 기록되어 있다. 국왕들이 목재 판매를 통해 수입을 늘리거나 사냥터로 이용하기 위해 공유토지를 계속해서 침해했기 때문에 1215년이 되면 왕실 숲이 143군데가 되었다.
가장 분노를 산 존 왕의 행동 가운데 하나는 사냥감인 사슴과 멧돼지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허가받지 않은 도랑과 울타리를 모두 파괴하라고 한 1209년의 명령이었다. 이 단 하나의 행동으로 공유자들은 공유지에서 생계수단을 얻을 수 있는 힘이 줄어들었다. 왕가와 귀족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사슴을 포함한 야생동물들이 필수 곡물과 채소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삼림헌장은 사실상 이 명령과 기타 명령을 철회했는데, 예전 공유토지에 대한 ‘폐림’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군주의 것이라고 간주되던 임지에 대한 공유권을 회복했던 것이다. 고대의 혹은 관습적인 공유권을 회복하는 데 대한 존중과 요구를 강조한 것, 이것이 삼림헌장의 핵심이다.
왕토에서 지정된 숲 구역을 해제하는 일은 그 구역을 보통법의 범위를 넘어서는 왕실의 삼림법에서 제외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토지를 공유자에게 회복시키기 위해 삼림헌장은 보통법의 영역을 확장했고, 정의正義의 기초로서 전통과 오래된 관습과 관행에 의거할 것을 확립했다. 오늘날에도 보통법은 영국과 전세계에서 선례에 기초한다.
삼림헌장은 또한 마그나카르타에서 이룬 커다란 진보를 뛰어넘어 시민권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보였다. 삼림헌장은 사슴 밀렵에 사형을 부과하던 군주의 권한을 폐지했다. 다만 범인은 여전히 벌금형이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사형보다〕 덜한 형벌로 거세와 눈을 뽑는 것을 포함한 신체훼손형을 폐지했다. 또한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던 왕실 삼림감독관royal forester에 의한 즉결심판을 중단시켰고, 그 대신 사법권을 왕실 삼림관리관verderer이 담당하는 지역 법원에 이관했다. 왕실 삼림관리관은 숲의 야생동물, 특히 사슴과 멧돼지 및 그 서식지를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지역의 하급관리였다. 그들은 사슴고기 탈취, 과도한 벌목이나 숲 지역의 훼손, 허가받지 않은 인클로저와 건축을 통한 침해 등 숲에 대한 범법 행위를 다루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유지의 ‘문지기’였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모든 시대와 모든 공유지는 공유지를 관리하고 공유자의 권리가 존중받도록 하기 위해 문지기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역사상 처음으로 삼림헌장은 관리인stewardship의 역할을 인정했던 것이다. 공식적인 소유권에는 공유지와 공유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따랐다. 국가와 공유자 사이의 암묵적 호혜성 속에서 왕가는 정복자 윌리엄이 차지한 토지를 승인받았지만그의 최근 후계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반대로 국왕은 공유자가 그 토지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전통적 이용권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왕가에 의해 이후 수세기에 걸쳐 공유자의 권리가 심각하게 무시당하긴 했지만, 삼림헌장은 반정부세력과 사회운동에도 영감을 주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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