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퇴직을 하던 날, 나는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병자. 그게 내 본명이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남은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도장을 버리려다 따로 챙겨두었다. 한자로 새긴 도장도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책상 서랍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칫솔과 슬리퍼도 버렸다. 이만하면 오래 다녔지. 오십이 넘은 뒤로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으므로 퇴직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내 의지로 그만두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붓고 있는 적금이 만기가 되면 사표를 쓸 계획이었다. 목표 금액까지는 몇 달 남지 않았다. 퇴직하고 무얼 할 계획이냐고 묻는다면 세계 여행을 다닐 것이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퇴직 후의 계획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여행이라고는 제주도에 두 번 갔다 온 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한 번은 출장을 겸한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디론가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고 싶은 나라는 텔레비전에 다 나왔다. 선풍기를 틀고 소파에 누워 사람들이 낯선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내겐 여행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트렁크를 끌고 공항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만 해도 무서웠다. 아버지가 목을 매 죽은 이후로 내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말린 단풍잎을 책갈피로 쓰던 여고생이었고, 오 남매 중 막내였지만, 침착하게 부엌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목을 죄고 있는 끈을 잘랐다. 시체가 된 아버지의 머리가 마룻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이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겁나는 일이 없었다. 그보다 더한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공항만은 달랐다. 그게 뭐라고. 그 환한 건물이, 수많은 사람들이, 트렁크 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무서웠다.
버스 정류장 근처 꽃집에서 나를 위해 꽃다발을 샀다. 그 정도 선물은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작별 선물 하나 없던 동료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섭섭지 않게 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들은 집을 떠났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았다. 사정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이 근처 중학교의 행정실에 사무 보조 자리를 하나 구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세 달 전이었는데,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졸업을 할 수 있게 처리도 해주었다. 중학교 행정실에서 일을 하면서 야간 대학교를 다녔다. 더 좋은 대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일을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았다. 하루에 한끼를 겨우 삼키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운좋게 중학교와 인문계 고등학교와 상업계 여자고등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제법 큰 재단의 학교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게 이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꽃병으로 쓸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찬장을 뒤졌다. 안쪽에서 맥주잔이 나왔다. 호프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백 시시 맥주잔이었는데, 어디서 난 것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잔에 꽃을 꽂고 나니 맥주가 한잔 먹고 싶어져서 상가 안에 있는 치킨집에 갔다. 가끔 들러 맥주를 마시는 집이었는데,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홀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혼자 마시기가 좋았다. 늘 그렇듯 나는 생맥주 한 잔과 골뱅이무침을 시켰다. 나는 프라이드치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입술에 기름이 묻는 게 싫었다. 그래도 주방에서 기름에 닭을 튀길 때 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좋았다. 기름 냄새를 맡는 것도 좋았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벽에 달려 있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연예인들이 의자 뺏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듯 끝날 듯 하다 계속되는 바람에 연예인들이 의자에 엉덩이를 댔다가 다시 춤을 췄다를 반복했다. 그 장면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다. 의자 뺏기 게임을 보다보니 어릴 적에 했던 짝짓기 게임이 생각났다.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게임이었다. 소풍 전날이면 나는 짝짓기 게임에서 첫 번째로 탈락하는 아이가 되는 악몽을 꾸곤 했다. 넌 저리로 가. 짝을 이룬 아이들이 나를 밀쳐내는 꿈. 그렇다고 외톨이로 학교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친한 친구들도 꽤 있었다. 나는 안주를 내온 가게 주인에게 오늘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가게 주인이 축하주예요, 위로주예요? 하고 물었다. 둘 다예요. 내가 대답했다. 나도 한때는 짝짓기 게임을 무서워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술을 마시며 생각했다. 짝짓기 게임. 그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중얼거려보자 여행은 안 가더라도 여권은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 뺏기 게임은 이제 두 사람만 남았다. 하얀색 의자 하나가 잔디밭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외국인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리 병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저어졌다. 병자 리. 그것도 싫었다. 여권에는 다른 이름이 적혔으면. 나는 포크로 소면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러자 어떤 생각이 번쩍하고 떠올랐다. 이름을 바꾸면 되잖아! 이름을 바꾸면 여권에도 다른 이름이 새겨질 테니까. 나는 가게 주인에게 맥주 한 잔을 더 달라고 했다. 이름을 바꾼다고 생각하니까 마시고 있는 술이 위로주가 아니라 축하주 같았다. 나는 맥주잔을 들어 허공에 대고 건배를 했다.
나는 어머니가 서른여섯에 낳은 딸이었는데, 가족 중 유일하게 병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물둘에 첫아들을 낳은 뒤로 이 년 간격으로 아들 셋을 더 보았다. 그러다 팔 년 뒤,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 다섯 남매의 이름에는 모두 ‘병’ 자가 들어갔다. 병철, 병곤, 병만, 병준, 그리고 병자. 내가 태어났을 때, 병철 오빠는 백 점을 맞은 수학 시험지를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어 어머니를 울게 만들었다. 어머니 대신 태몽을 꾼 사람도 큰오빠였다. 어렸을 적에 큰오빠는 마루에 앉아 태몽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내가 논두렁을 걷고 있었어. 잠자리가 하늘에 가득했지. 길을 걷다보니 개울이 나와서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글쎄 건너편에서 소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지 뭐야? 거기까지 말을 하면 어린 나는 그래서? 그래서? 하고 추임새를 넣곤 했다. 개울을 건너갔더니 소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라고. 내가 소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어. 그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가 자꾸 따라오는 거야. 가라고 돌을 던져도 자꾸 따라왔어.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묻곤 했다. 돌을 던졌어? 소가 맞았어? 아니 안 맞았어. 그냥 바닥에다 던졌어. 그랬는데도 집까지 소가 따라오더라고. 이 마당 한가운데로. 나는 오빠가 해준 태몽 이야기가 좋았다. 오빠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온 소라니. 둘째인 병곤 오빠는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자고 있는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니 동시 몇 편이 저절로 떠올랐고,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다. 둘째 오빠는 검지손가락으로 아기인 내 볼을 톡톡 치는 것을 좋아했다. 나를 낳고 건강이 나빠진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업어준 사람은 넷째인 병준 오빠였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가르쳐준 사람도, 방학 때마다 탐구생활 숙제를 해준 사람도, 그림일기를 대신 써준 사람도 넷째 오빠였다. 마지막으로 셋째 오빠. 가족사진에서 오래전 잘려나간 병만 오빠. 나는 셋째 오빠를 생각하면 등목을 하던 장면만 떠올랐다. 뭐가 그리 열이 나는지 셋째 오빠는 자주 등목을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당에 던지고는 웃통을 벗었다. 그러고는 내게 소리쳤다. 이리 와 물 좀 끼얹어! 마당 수도꼭지에는 녹색 호스가 달려 있었는데, 나는 그 호스의 끝을 잡고 오빠 등에 물을 뿌렸다. 어떤 날에는 오빠 등에 물로 바보 등신 따위의 글자를 쓰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똑바로 해. 팬티에 물 들어가.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날에도 셋째 오빠는 등목을 했다. 군대에 갔다 휴가를 나온 큰오빠가 등목을 하는 셋째 오빠를 보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너라면 얼음을 깨고 계곡에 들어가는 훈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겠다. 큰오빠의 말처럼 셋째 오빠는 혹한기에도 입수를 가장 잘하는 병사가 되었다. 셋째 오빠의 생활기록부에는 참을성이 있는 아이라는 평이 적혀 있었다. 그랬던 오빠였는데. 오빠가 감옥에 간 뒤로 어머니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소파의 손잡이를 검지 손톱으로 뜯어가면서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야. 셋째를 낳고 나니 이상하게 모유가 안 나오더라고. 어머니는 같은 말을 하고 또 했다. 애는 배고파 우는데 젖은 나오지 않고. 나는 그 말을 십 년 동안 들었다. 미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머니가 같은 말을 반복할 때마다 혼자서 끝말잇기를 했다. 그때부터였나. 일 년에 고작 한두 번 찾아와서는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오빠들이 우습게 여겨지기 시작한 게. 이름을 바꾼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오빠들에게 복수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누군가가 왜 이름을 바꾸냐고 물어본다면 오빠들과 돌림자를 쓰는 게 평생 짐이었다고 대답하리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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