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사랑, 미니멀 코뮤니즘에 이르는 멀고 험난한 여정
개별성은 사랑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는 바로 이 개별성을 넘어서려는 욕망이다.
― 로버트 솔로몬Robert Solomon
사랑의 다면성과 역사성:
서구 사랑 담론의 원천으로서의 플라톤의 『향연』
“에뤽시마코스, 다른 신들에게는 시인들이 지어놓은 송가와 찬가가 있거늘 그토록 오래되고 그토록 위대한 신인 에로스에게는 이제껏 살아온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찬가 하나 지어놓은 게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파이드로스가 에뤽시마코스에게 했다고 전해지는 이 항변은 기원전 400년 무렵 아테네의 어느 향연장에 참석한 이들이 사랑을 주제로 담소를 나누게 된 연유이다. ‘에로스’라고 불리는 사랑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파이드로스가 동원한 표현, “그토록 오래되고 그토록 위대한”이라는 구절은 사랑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자 고귀한 가치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중대한 사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이 무능과 나태에 대해 철학적 교정을 시도한다. 플라톤이 사랑 담론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벌이는 사유의 향연, 사상의 경합을 지적 쾌락으로 바꾸는 이 유쾌한 대화는 사랑 담론의 전범을 제시했다. 서양의 사랑 담론은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일련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발언이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본질과 기능을 둘러싼 서양의 논의가 기독교와 함께 플라톤의 자장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기독교적 사랑조차 ‘플라토닉 러브’라고 알려진 이 그리스 철학자의 이름을 딴 사랑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향연』을 철학의 위대한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에 관한 플라톤의 입장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목소리에서 확정되고 다른 화자들의 입을 통해 게시되는 이야기들을 잘못된 것이라고 단순 폐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화자가 하는 말은 사랑의 중요한 측면을 짚어내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발언이다. 소크라테스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명의 연사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 대화에서, 사랑 논의와 관련하여 세 개의 주목할 만한 담론이 제시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을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으려는 존재론적 결합의 욕망으로 정의하고 있고, 디오티마라는 가상의 지혜로운 여성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은 사랑을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좋음에 대한 갈망으로 읽어낸다. 이 갈망을 이끄는 동인은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이다. 결핍에서 출발한 에로스는 결핍을 채워줄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갈망하고, 그 갈망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보편성과 영원성의 바다에 이른다. 소크라테스가 정의하는 사랑은 개별적 존재로서의 구체적 개인에 무심하며 육체적 욕망을 초월한다. 여러 화자들의 연설이 진행되는 동안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딸꾹질은 육체적 차원을 벗어나 천상에서 노니는 담론들에 인간의 몸이 보내는 거부 신호이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의 발언이 사랑에 대한 진리를 결정짓는 듯 보이는 순간 그를 연모하는 아름다운 청년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하여 그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술에 취해 우스꽝스러운 말을 늘어놓는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초월적 사랑개념을 상대화한다. 연상의 동성 연인을 향한 그의 사랑은 소크라테스라는 한 인격체를 향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으로서, 앞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사랑 개념에 대한 희극적 반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알키비아데스의 사랑 요구에 소크라테스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알키비아데스가 그에게서 찾는 것을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실상 알키비아데스의 사랑 요구는 타자 안에서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발견하려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욕망의 대상을 찾고, 또 다른 아름다운 청년 아가톤이 소크라테스를 흠모하여 그의 곁에 앉으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 젊은 남자가 벌이는 질투 어린 말싸움은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의 그리스 버전과도 같은 이 희극적 장면에서 사랑은 한 대상에 고정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진리의 조달자로서 소크라테스는 욕망을 추동하는 이런 환상의 연쇄 회로를 벗어나 주체의 진리를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한다. 소크라테스, 그는 사랑의 수행자가 아니라 욕망의 분석가이다.
『향연』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해석은 사랑이 다면적 성격을 지닌 인간의 복합적 경험이자 사건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해석이 사랑에서 존재론적 결핍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을 읽어낸다면, 디오티마는 결핍을 메우려는 욕망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적 이상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알키비아데스는 어느 한 개체적 존재를 향한 성적 욕망이라는 육체적 차원을 다시 불러들인다. 사랑이 지닌 이 세 측면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주요 사랑 형태들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사랑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해석은 존재의 합일을 갈망하는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으로, 알키비아데스의 해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귀부인을 향한 육체적 구애의 형태를 띤 ‘궁정식 사랑courtly love’으로 나타나다. 디오티마의 해석은 개별 영혼의 내적 느낌을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과 결합하여 ‘성스럽고 이상적인 사랑sacred and ideal love’으로 발전한다. 기독교는 성적 사랑을 가져와서 그것을 더 이상 성적이지 않고 개인적이지 않으며 인간적 수준을 넘어서는 사랑, ‘카리타스caritas’라고 불리는 숭고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이처럼 사랑이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의 규범적 정의로 사랑이 지닌 다면적 측면들을 소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사랑의 형식과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정식 사랑이 결혼 제도 바깥에서 불륜의 형태로 일어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낭만적 사랑은 종국적으로 이성애 핵가족 속으로 수렴되면서 결혼 안의 성으로 통합된다. 물론 낭만적 사랑에는 결혼 제도와 합치되지 않는 균열의 지점들이 존재하며, 이것이 낭만적 사랑을 위반의 아우라로 물들게 한 이유이다. ‘사랑’에 대한 이해가 ‘사랑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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