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이
진아씨를 떠올리면 나는 언젠가 그녀가 소화기를 사야겠다고 하던 게 생각난다. 진아씨와 많은 날 여러 얘기를 나누었지만 이상하게도 진아씨 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휴대폰 화면을 밀어올리면서 진아씨는 투척형 소화기로 살까 스프레이형 소화기로 살까 물었다. 식탁에는 견과류 껍데기가 흩어져 있었다. 욕실 거울 위에 붙어 있던 동그란 시계. 변기 안에 떠 있던 참외 씨 하나 ― 그건 진아씨한테서 나온 것일까, 진아씨 남편한테서 나온 것일까, 진아씨 아이한테서 나온 것일까?
진아씨네서 건너다본 내 집 창문도 기억난다. 저 끝은 작은방 베란다 창. 오른쪽은 중간 방 창. 가운데에 작게 붙어 있는 건 주방 창. 진아씨네서 보면 이십층 외벽에 매달린 내 집은 놀랍도록 왜소해 보였다. 저기가 정말 거긴가? 몇 달 넘게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여전히 대출금을 갚고 있는 그 집? 하지만 나는 진아씨네서 내 집을 바라보는 시간을 싫어하진 않았다. 그 시간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다 지난 얘기다.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진아씨가 살던 집에 들어가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진아씨네서 시간을 보내던 때를 떠올린다. 창문 밖이 천천히 짙어지던 저녁을 생각하고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먹던 차가운 맥주를 생각한다. 어느 날엔 진아씨 남편의 것이 분명한 면도기로―진아씨는 이 사실을 모른다―겨드랑이 털을 재빨리 밀어버리기도 했다. 진아씨네 식탁 의자는 네 개였고 그중 두 개엔 늘 옷가지가 걸려 있었다. 냉장고 손잡이엔 한참 된 〈겨울왕국〉 스티커. 돌고 또 돌아가는 공기청정기. 나쁨. 상당히 나쁨. 매우 나쁨. 윤이들이 곧 가져올 생활통지표는 잘함. 매우 잘함. 이후 계속 매우 잘함.
하지만 내가 떠올리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는 진아씨가 소화기를 주문하던 일을 생각하고 싶다. 에어컨을 틀 만큼은 아니었지만 더웠다. 방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진아씨는 싱크대를 등지고 식탁에 앉아 있다. 쇼핑몰 앱을 열어 검색창에 ‘소화기’라고 친다. 어떤 업체에서 주문할까 잠시 탐색한다. 소방서에 납품도 한다는 업체를 선택한다. 스프레이형 소화기로 결정한 뒤에는 다용도실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분말소화기를 보고 온다. 거기에 씌울 비닐 커버도 함께 주문한다. 곧 백십일 년 만의 폭염이 찾아올 예정이지만 진아씨도 나도 우리에게 어떤 여름이 올지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진아씨 맞은편에 앉아서, 저렇게 여분의 소화기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어떤 순간에 아주 나쁜 선택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날 진아씨가 주문한 초기 진압 소화 용구는 택배 상자에 그대로 담긴 채 내 집에 있다. 소화기를 주문하는 마음과 이제는 소화기가 필요 없어진 마음, 진아씨, 그 사이엔 뭐가 있는지.
*
진아씨가 떠난 뒤로 내게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인지하는 기준은 진아씨가 되었다. 옆 동네로 칼국수를 먹으러 가서는 생각한다. 지난번에 이걸 먹을 땐 진아씨가 있을 때였지. 미용실에 가서 뿌리 염색을 하면서도 생각한다. 지난번 염색 때만 해도 나는 언제든 진아씨와 연락할 수 있었는데. 아이가 영어학원 핼러윈 파티 공지문을 가져왔을 때도 생각했다. 작년 핼러윈 때는 진아씨가 있었지. 우리는 두 윤이―진아씨의 윤이와 나의 윤이―를 나란히 세워놓고 뺨에 해골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눈두덩에 펄 섀도를 잔뜩 발라주고 입가에 피도 흘리게 해주었다. 다이소에 핼러윈 소품들이 등장하면 이젠 선풍기를 넣어놔야 한다. 에어컨에 커버도 씌워야 한다. 하지만 10월이 다 저물어가도록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카페에서 벌써 캐럴을 튼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 말도 안 되지. 하늘이 저렇게 창창한데 어떻게 벌써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수 있지? 머플러로 목을 가린 사람들을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올여름에 정말 더웠잖아요. 안 그래요? 벌써 잊었어요?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진아씨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시간을 되돌릴 지점을 궁리하는 사람처럼 지난여름의 장면들을 불러오고, 뒤섞고, 밀어내고, 다시 불러들인다.
일기예보 앱에 일주일 내내 우산이 표기돼 있었다. 아마 7월 초였을 것이다. 홈쇼핑에서 전동 발 각질 제거기 두 개를 주문했다. 하나를 진아씨한테 주었지. 7월 중순엔 젊고 멋진 남자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영수증 버려드릴까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질문도 받았다. 임신 가능성이 있으신가요? 나는 간호사에게 속삭이듯 답해주었다. 없―어―요―전―혀. 방학 전의 어느 저녁엔 아이랑 둘이 근린공원 옆에 있는 닭갈빗집에 갔다. 아이한테 막국수를 시켜주고 옆에서 청하 한 병을 비웠지.
밤새도록 더웠다.
너도나도 한 손에 미니 선풍기를 들고 다녔다. 고무장갑의 손가락 끝이 자꾸 녹았다. 밖에 오 분만 서 있어도 살갗이 아렸다. 차 문을 열면 헉 소리가 났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한 시간도 견디기 힘들었다. 가마솥 더위. 기상관측 이래 최고의 더위. 1994년을 훌쩍 넘어선 더위.
진아씨네 집에 가게 된 걸 폭염 때문이라고 해두자. 아니다. 여름방학 때문이라고 하자. 아이들은 폭염 한중간에 방학을 했고 밖에서 노는 건 불가능했으니. 아이가 방학을 하면 개인 시간은 어차피 없었다. 핸드 로션 바를 틈도 없이 낮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만났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런 것들을 되짚는다. 더운데도 머리를 풀고 다니던 것. 바닥에서만 부풀던 풍선. 끈 원피스를 입고 나란히 걸어가던 열한 살 윤이들. 앨리스 양산. 창문이 흔들리던 소리. 바람이 보여준 것들. 그리고 진아, 진아씨. 나는 오늘도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진아씨가 이전 글들을 지우지 않았는지 보기 위해 매일 지역 맘카페에 들어간다. 하루에 서른아홉 번, 어쩌면 아흔아홉 번. 진아씨는 새 글을 올리지도 않았고 이전 글과 댓글들을 지우지도 않았다. 지난 두 달, 어디서도 진아씨가 움직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나는 진아씨가 그동안 올린 글 목록을 습관처럼 읽는다. 오늘 문 여는 안과 있나요? 지금 코스트코 주차장 상황. 아이사랑적금 넣고 계신 분. 머리는 몇 살 돼야 혼자 말릴까요. 외부 새시 교체 견적이요. 티벳버섯 효과 어떤가요?
고추청을 담갔다는 게시 글도 있다. 나는 그 글을 제일 자주 클릭해본다. 내가 아는 진아씨는 그런 걸 담가 먹는 사람이 아니다. 담갔다면 나한테 나눠주지 않았을 리도 없다. 나는 고추청 때문에 그 닉네임―윤이맘7―이 진아씨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글들은 진아씨가 아니라고 보기가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윤이맘7이 올린 사진 중엔 진아씨의 카톡 프로필 사진과 같은 게 있었다. 진아씨네 식탁 등 사진이었다.
누군가 매직펜을 든다. 천장에서부터 선 하나를 그어 내린다. 허공에 탐스럽고 둥근 갓 하나를 띄운다. 폭염에 갈 곳 없는 이들을 위해.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진아씨네 집에서 식탁 등은 제일 빛나는 사물이었다. 우리는 그 등 아래에서 얼마나 여러 초저녁 함께 술을 마셨던가. 윤이들은 집안에서 안전하게 놀고 있고 남편들은 안 오거나 늦었고 우리에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