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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폭력에 대하여
새로운 여성살해
17세기 프랑스의 동화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전해 내려오는 민담과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잔혹 동화 〈푸른 수염〉. 내가 처음으로 이 동화를 읽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열두 살의 어린아이였던 나는 주인공이 바닥에 피가 흥건한 비밀의 방에서 열쇠를 떨어뜨린 후, 열쇠에 스며든 핏자국을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더라는 대목에서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그렇게 열두 살 소녀에게 ‘푸른 수염’으로 대표되는 연쇄살인마, 그것도 자신의 아내들을 차례로 죽이는 살인마와 ‘금지된 방’이 주는 선명한 이미지는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푸른 수염’은 대저택에 사는 부유한 귀족이었지만, 수염이 푸른색이고 그의 아내들은 하나같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근방의 젊은 처녀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피했다. 그의 이웃에 사는 귀부인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푸른 수염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8일 동안 화려한 파티를 열었고, 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세상물정을 모르고 식견이 없는 둘째 딸을 현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푸른 수염과 결혼했다. 어느 날 푸른 수염은 멀리 다녀올 일이 있다며, 어린 아내에게 열쇠 꾸러미를 넘긴다. 금은 접시가 가득한 방, 금은보화가 가득한 방 등 그는 각 방의 열쇠를 가르쳐주며 다른 방은 얼마든지 열어보아도 좋지만, 큰 회랑 끝에 있는 벽장문만은 절대로 열면 안 된다고 일렀다.
푸른 수염이 떠난 후, 어린 아내는 친구들을 초대해 화려한 방을 열어보았다. 친구들이 부러움에 가까운 탄성을 지를수록, 그녀는 푸른 수염이 금지했던 벽장문 방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몰래 작은 열쇠로 벽장문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 있던 것은 벽에 기대놓은 시체들, 실종된 줄만 알았던 아내들의 시체였고, 바닥은 그들의 피로 흥건했다. 그것을 본 순간 어린 아내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열쇠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열쇠로 문을 잠근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지만, 열쇠에 스민 핏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핏자국은 비누로 씻어도 모래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푸른 수염은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고, 아내에게 열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열쇠에 스며든 핏자국을 보고 아내가 벽장문을 열었음을 알아챘고, 그녀를 죽이려 했다. 푸른 수염의 아내는 기지를 발휘해 죽기 전 잠시 기도 시간을 달라 한 후, 마침 자신의 집을 방문한 언니에게 탑으로 올라가 오늘 오기로 한 오빠들이 오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이윽고 푸른 수염이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단도를 높이 치켜들어 그녀를 살해하려는 순간, 오빠들이 들이닥쳐 푸른 수염을 칼로 찔러 죽였다.
다행히도 이 동화의 결론은 해피엔딩이다. 푸른 수염의 재산은 그녀가 다 상속받아, 언니를 결혼시키고 오빠들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이 서슬 퍼런 동화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그리고 아주 정직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는 푸른 수염과 지낸 악몽의 시간을 잊게 해줄 만큼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푸른 수염의 실제 모델로는 15세기 희대의 소년성애자이자 연쇄살인마인 프랑스의 질 드 레 남작, 혹은 6명의 아내 중 몇 명을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참수시킨 영국의 헨리 8세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결론이 매우 상세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최초로 민담에 수록된 연쇄살인마, 즉 여성살해자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는 ‘여성살해femicide’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자행되었고, 여성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보다 남편이나 연인, 지인 등 아는 사람들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여성살해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며, 전 세대의 수많은 여성들이 가족이나 애인, 지인, 혹은 자신을 스토킹 하는 사람과 같은 면식범에 의해 목숨을 잃어왔다. 이것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예전보다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여겨지는 최근에 이르러서다.
여성살해, 즉 ‘페미사이드’라는 용어는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여성대상범죄 국제재판’에서 정식화되었다. 다이애나 러셀Diana E. H. Russell은 페미사이드를 “남자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여자들에 대한 혐오 살인”으로 규정하고, 2001년에는 페미사이드를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살해한 것”이라고 재정의한다. 러셀은 1990년 제인 카푸티Jane Caputi와 공동 작업한 글에서는 페미사이드를 “여성들에 대한 증오, 경멸, 쾌락, 또는 숭배관에 따른 동기를 가진 남성들에 의한 성차별적 테러리즘의 가장 극단적 형태”로 정의한다. 러셀이 분류한 페미사이드의 유형에 따르면, 가족이나 애인 등 면식범에 의한 여성살해가 낯선 사람에 의한 살해보다 우선적으로 유형화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국내 미디어에서만 발표된 살인 사건을 조사한 결과, 2019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최소 88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196명이라고 발표했다. 피해 여성의 자녀나 부모, 친구 등 주변인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고 33명에 달했다고 보고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여성살해를 자행한 가해자들의 범행 동기 중 가장 많은 비율29.6%을 차지한 것이 피해자가 “이혼, 결별을 요구하거나 재결합, 만남 등을 거부해서”이며, 피해자 37명은 가해자의 살해 행위 이전에 스토킹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즉, 여성살해는 이별을 빌미로 한 살인의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여성 피해자의 49퍼센트는 40~50대 여성들이며, 주로 가정폭력의 희생자들로 이혼이나 결별을 요구하다 살해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근 20~30대의 이별 살인 역시 증가 추세에 있으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수면 위로 떠으로고 있다.
이러한 살인은 이별 범죄의 한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별 범죄란 배우자나 연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이 이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과정에서 이성을 잃고 애인에게 물리적 폭행이나 성범죄,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는” 범죄를 일컫는다. 이는 분노조절장애 범죄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이러한 살인은 이별 범죄의 한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별 범죄란 배우자나 연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이 이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과정에서 이성을 잃고 애인에게 물리적 폭행이나 성범죄,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는” 범죄를 일컫는다. 이는 분노조절장애 범죄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2014년 여자 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무자비하게 차로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별을 통보한 동거녀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 이별 범죄는 2011년에는 6700여 건, 2012년에는 7000여 건, 2013년에는 6598건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의 집에 배관공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여자 친구의 부모를 살해하고 여자 친구를 감금한 채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고, 2019년 1월에는 교제하던 여성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에 찾아가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이 시대의 이별 범죄는 전 연령대를 가로질러 여성에게 자행되고 있는 중이다.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자신의 요구나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성들을 폭행 또는 살해하는 이별 범죄는, 그러나 단순한 분노조절장애 범죄로 치부하기에는 친밀 영역 안에 젠더 권력관계와 불평등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다. 나는 막 남자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나를 주시하고 내 곁을 맴돌던 두 학번 위의 선배. 그는 나의 첫사랑이자, 첫 교제 상대였다. 우리는 만 2년을 사귀었지만 그와의 교제는 쉽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슨 과목을 수강하고, 누구와 그 강의를 듣는지 확인했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가면 카톡으로 30분마다 한 번씩 어디냐고 물었고, 저녁 9시가 넘어가면 5분 간격으로 카톡을 보냈다. 그의 집착으로 동아리도 흐지부지 나오게 되었다. 점점 나의 일상을 옥죄어오는 그의 카톡과 메시지와 전화, 그것이 나중엔 협박 어린 집착이 되었다. 나는 나머지 2년의 대학 생활을 좀 더 자유롭게 보내고 싶어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카톡 폭탄을 맞았다. 그중엔 우리의 성관계를 몰래 찍은 영상이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도 그 영상을 30초 단위로 여러 개 잘라 보냈다. 익숙한 듯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모습으로 재현되는 나의 모습.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 “곧 인터넷 사이트에 다 이게 퍼질 거야, 각오해”라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와 함께.
최근 몇 년간 이별 범죄는 ‘리벤지 포르노’라는 이름의 ‘디지털 성폭력’으로 쏟아져내렸다. 리벤지 포르노란 “당사자의 동의나 인지 없이 배포되는 음란물 영상을 말한다. 연인 등 친밀하거나 아는 관계인 사람 간의 이별에 앙심을 품고 상대를 모욕하기 위해 유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리벤지 포르노’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18년 한 20대 여성 연예인과 그녀의 남자친구가 쌍방 폭행을 하고, 이를 남자친구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성관계 동영상 유출로 보복하겠다고 협박한 사건이 알려진 이후였다. 이 사건은 법원에서 남자의 불법 촬영 혐의가 무죄 판결을 받고, 2019년 피해자가 끝내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비극으로 끝났다. 그 이면에는 재판을 담당한 판사가 피해자와 변호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불법 촬영 동영상을 확인하고, 일반인들이 가득 찬 법정에서 두 사람의 내밀한 사적 관계를 만천하에 밝히는 등 사법부에 의해 자행된 2차 가해도 있었다.
사실 ‘리벤지 포르노’의 문제는 디지털 기기의 발전과 더불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문제이다. 불법 인터넷 사이트 소라넷이 2016년에 폐쇄되고 몇 년이 흘렀지만,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웹사이트에서 전 남자친구나 혹은 지인들에 의해 몰라 촬영된 영상물들이 ‘한국 포르노’ 혹은 일본에서 수입된 포르노인 양 배포·확산되었다. 그 가운데 자신의 ‘리벤지 포르노’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유통된 것을 안 피해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상물은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유통되었고,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은 당해도 싸다는 온라인상의 조롱도 있었다. ‘리벤지 포르노’라는 용어는 보복을 의미하는 ‘리벤지’라는 단어가 피해자의 과오로 복수를 당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최근에는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용어로 대체되고 있다.
또한 ‘몰카’라는 희화화된 이름의 불법 촬영 성범죄 역시 학교, 병원, 공중화장실, 탈의실 가정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웹상에서 유포·공유되는 실정이다. 2019년에는 한 여성 임상치료사가 함께 일해온 동료 남성이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불법 촬영을 해왔다는 사실을 안 뒤, 악몽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앞의 두 사건을 포함해 불법 촬영으로 피해자가 자살에 이르는 사건들은 모두 디지털 시대 새로운 형태의 성폭력이자 ‘여성살해’라고 할 수 있다. 불법 촬영을 당한 여성은 죽음을 택하기도 할 만큼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성연대’의 사회에서 정작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미약한 현실에 여성들은 분노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디지털 성폭력, 혹은 불법 촬영에 대한 정의와 그 양상들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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