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지난봄 오랜만에 일산에 갔을 때 나는 그곳이 내가 살았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도시는 어느 정도의 성장을 이룬 뒤에는 그 추동에 무심해진 사람들처럼 정체와 안정 사이에 멈춘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아? 하고 동의를 구하자 앞자리의 남편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칭다오와 닮았다, 라며 남편은 우리가 지난해까지 살았던 중국의 도시를 떠올렸다. 칭다오는 일산을 닮은 것이 아니야. 칭다오는 그냥 한국의 신도시들을 닮았을 뿐이지. 그게 다른가? 하고 커브를 돌며 남편이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일산의 오래된 쇼핑몰인 라페스타에는 붉은 벽돌 외관의 원미우동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도 있네, 하며 놀랐지만 어디를 말하느냐고 남편이 물었을 때는 그냥 아는 식당이 있다고만 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장의사가 떠올랐고 더러는 지워지고 묽어져 더 이상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 복잡한 통증이 느껴졌다. 우동집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쇼핑몰 끝자락에 있었고 영업을 알리는 나무 현판이 나와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학교와 학원을 다니며 십대 시절을 보낸 아이들을 좀 감상적으로 표현한다면 ‘장래하지 않을 장래희망의 변천사를 지켜본 사이’쯤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 칸이 자주 바뀔수록 입시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쉼 없이 희망을 갱신하면서, 나중에는 그것이 자의 반 타의 반 제멋대로 굴러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꿈이 꿈으로 대체되는, 하나의 꿈이 여러번 종신형을 받아 각자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물론 장의사는 그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의사’라는 장래희망이 한번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공부를 잘했으니 사실 바꿀 필요도 없었다.
애들은 장의사가 은근히 부럽고 아니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괴롭히거나 따돌리는 일에 열을 올릴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에 별명을 붙여 부르며 적당히 그 감정을 소비했다. 장의사가 정말 의대에 붙으면서 우리는 말이 씨가 되었다고 입을 보았다. 의사 의사 하니까 정말 의사가 되는구나, 하고. 나는 내가 재수에 이어 삼수를 하게 된 것도 그 탓이 아니었을까 가끔 우울하게 반추했다.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엄마와 나는 불운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썼기 때문이었다.
위축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삼수의 봄이 되자 나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게 되었다. 학원도 서울까지 나가지 않고 일산에서 다녔다. 아침이면 떠나는 사람들로, 저녁이면 돌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직행버스 정류장과 전철 플랫폼을 이상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게 된 것도 그즈음의 변화였다. 그러나 목련 꽃망울이 맺힌 늦은 3월쯤 장의사를 보게 되었다. 그애는 이른 아침 프랜차이즈 토스트집에 앉아 있었다. 졸업할 무렵에 비해 살이 좀 찐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직행버스를 타기 전 요기를 하나 싶었지만 며칠 동안 반복되자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토스트집은 낮아서 커피를 마시며 브런치 기분을 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매번 찾을 만큼 맛집도 아니었으니까.
그때 나는 손을 떨거나 사람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것, 식사를 거르거나 폭식하는 것, 제대로 씻지 않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표현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해서 나 자신을 반짝반짝하게 만들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냥 방치해두어서 사람들 앞에 서기 꺼려지고 완전히 고립되는 느낌에 매달렸다. 말라서 볼품없어지는 것도 내가 원하는 상태였는데, 그걸 또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고 친구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한동안 장의사가 앉아 있는 토스트집을 피해 상가건물을 둘러 학원에 가봤지만 바쁜 아침마다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러다 어느 주말, 종로 어디에서 한다는 과학탐구 특강을 들으러 가게 되었다. 그렇게 멀리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백발백중의 유명 강사라고 해서 야간까지 이어지는 강의에 오만원을 내고 등록했다. 폭이 한뼘 정도 되는 긴 테이블에 수백명의 수강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필기를 할 때마다 팔이 스칠 정도였다. 내 옆에는 재수생치고는 좀 늙수그레한 긴 파마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게 작은 쪽지를 쥐여주고 나가버렸다. 거기에는 질염이나 냉이 심하면 병원에 가보라고 쓰여 있었다.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고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서울의 모 대학을 다니다가 의대에 가려고 재수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무감하게 읽고는 쪽지를 반으로 접었다. 뒷면은 고기집 광고였다. “순수 100퍼센트 한우! 아닐 시 100배 변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벌건 고기의 원색적인 프린팅과 변상!이라고 강조된 굵은 글씨, 그리고 순수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뒤엉키면서 뭔가 먹고사는 일을 구차하게 끝 간 데 없이 다운그레이드시키는 느낌이었다. 개사이코 같은 게, 라고 나는 속으로 욕을 했다. 자기가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인간들치고 이상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고.
그날 처음으로 서울에서 일산까지 택시를 탔다. 강의는 끝까지 다 듣지도 못한 채였다. 강변의 수풀은 시 경계를 지나면서 점점 색이 옅어졌는데 그러면 봄이 아직 흐릿하다는 얘기였다. 아파트 정문에는 엄마가 택시비를 들고 초조한 얼굴로 마중 나와 있었다. 주미야, 하고 엄마가 불렀을 때 나는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하필이면 쪽지를 준 사람이 의대 준비생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등원길마다 자꾸 눈에 띄어서였는지 나는 장의사를 어떻게든 조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장의사에게 SNS로 메시지를 보내 미안하지만 그 토스트집에 앉아 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보내면서도 내가 이 거리의 주인도 아니고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는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 의대에 갔으니까 내 처지를 이해해라, 하는 식이었다. 보내고 나서 한 이틀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 소문을 걱정했다. 이 동네 아이들의 신상은 유리알만큼이나 투명해서 누군가 머리 스타일만 바꿔도 삽시간에 퍼질 정도이니까. 그 마당에 1902호 집 딸애가 삼수생활로 좀 이상하게 되었다더라. 우울증에 걸렸다더라. 하는 말이 아파트에 퍼지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장의사는 며칠 지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겠어”라고 답을 보내왔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당장 들어주기는 힘들겠다. 나도 사정이 있어서 거기서 시간을 보내야 하거든. 설명이 긴데 잠깐 만나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부담은 갖지 말고 그냥 캐주얼하고 오픈된 마인드로.
누구를 만날 기분도 처지도 아니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파트 공터에서 잠깐 보자는 장의사의 말은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하는 제안으로, 이왕이면 맛있는 점심을 먹자는 결론으로 바뀌었다. 나는 엄마가 아무리 권해도 찾지 않았던 미용실에 가기 위해 4월의 토요일, 스스로 집을 나섰다. 막상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보니 지금까지 어떻게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햇볕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쥐어 따뜻해졌는데, 가능하면 그것이 나의 무언가를 녹여주었으면 싶었다. 겨우 스물하나였던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런 내면의 균열이나 변화가 필요하다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 상해야 한다면 돌이킬 수 없게 상하고, 다쳤다면 그 다쳐버린 상태를 내보일 수 있는 무른 마음을 갖는 것.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마음의 형질을 헤아릴 수가 없었고 너울처럼 나를 덮는 나쁜 상태를 이기기 위해서는 더 견고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잘 지냈느냐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곧장 예정해놓은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마치 그걸 먹는 일이 만남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별다른 말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통으로 아는 친구들 이름을 대며 말문을 열었지만 둘 다 그들의 근황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점만 같았다. 햄버거 가게는 문은 열어놓고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정전이라 햄버거를 팔지 않는다고 사장이 말했다. 그러면 그냥 돌아서면 될 일을, 장의사는 오히려 파는 것이 낫지 않아요? 하고 참견했다. 어차피 굽는 건 가스로 하고 전기가 나갔으면 냉장고에 쌓인 패티들도 문제일 텐데 차라리 얼른 팔아버리라는 말이었다. 사장은 패티 역시 가스가 아니라 전기 그릴로 굽는다고, 한전에서 곧 올 거라고 상대를 해주었다. 우리는 기다리기로 하고 가게 한구석에 서 있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장의사가 사장에게 가서 한전에서 왔느냐고 확인했는데, 그때에야 우리가 거기 서 있는 줄 깨달은 사장은 “내가 아까 영업 안 한다고 안 했나?” 하고 되물었다. 사장의 그 한마디에 장의사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굳는 것을 나는 지켜보았다.
“아저씨, 경우가 참 없으시네요.”
장의사는 안경을 천천히 벗으면서, 거슬리는 무언가가 시야를 가린다는 듯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내가 시간을 정했나, 곧 준다 약속을 했나, 경우는 학생이 없네.”
이번에는 사장도 그냥 넘길 수가 없는지 불쾌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나는 장의사가 원래 이렇게 공격적인 애였나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목장갑 끼고 계시죠?”
장의사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자 사장은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방에서 식자재를 다듬다 왔는지 파슬리 같은 것이 붙어 있고 불그스름하게 핏물이 번져 있었다.
“그거 끼고 음식 다듬는 거 식품위생법 위반이잖아요.”
“아니야, 뒤쪽에서 내가 연장 정리 좀 했지. 주방에서는 쓰지를 않아요.”
“무슨 연장 정리하셨는데요?”
“연장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인데 일단 여기가 식당이니까 식자재를 가져오는 트레이도 있고 화구 같은 것도 있고.”
“전기 그릴 쓰신다면서요.”
사장은 장의사가 그렇게 물고 늘어지자 잠깐 생각하다가 일단 목장갑부터 벗었다. 전기가 나간 가게 안은 너무 고요해서 대로변의 소음이 들린다기보다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다행히 장의사는 더는 흥분하지 않고 내게 가자고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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