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
거버넌스의 새 틀과
대안문명의 길
― 백영서
1. 지금 왜 이 책을?
세계사의 운명의 결정적인 매듭의 한 알맹이가 풀리고 얽히는 분기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문학평론가 임화의 중국에 대한 논평이다. 중국이 일본과의 전면전에 시달리던 1938년에도 중국 문제가 세계사적 문제라는 시각이 있었다. 그러니 대국으로 굴기한 지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 세계인이 힘겹게 감당하는 고난과 혼란의 팬데믹 시기에 중국은 새삼 세계적 주목을 끌고 있다. 코로나19 증상이 처음 보고된 장소가 중국의 ‘2급 도시’인 우한이라서만은 아니다. 중국식 방역 방식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가 방역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둘러싼 것이다.
이 쟁점은 세계적으로 반중감정이 확산되는 가운데 불거져 한층 더 논란을 부채질했다. 그리고 중국 문제는 각국의 발전전략과 연관된 것이기에 (적든 크든) 내부 정치 논쟁의 쏘시개로 작용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점점 더 ‘분열적 쟁점’으로 작용을 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거니와 우리 사회도 예외가 아님을 실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실에서 중국의 방역 방식을 깊이 있게 이해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이 책을 펴내는 취지이다. 이에 비춰 우리 사회 또한 편견 없는 시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보기에 따라 아직 팬데믹 사태가 진행 중인 지금 중국의 방역 방식을 논의하는 일 자체가 시기상조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팬데믹과의 싸움은 단순히 방역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기존 세계의 병폐를 키운 국가나 문명의 ‘민낯’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런 만큼 단순히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 대한 국제비교표로 방역 방식의 우열을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되돌아갈 길이 막힌 이전의 ‘정상’이 과연 정상에 값하는 것이었는지 묻는 지금, ‘새로운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가기 위한 근본적인 성찰과 의지가 요구되는 때이다. 다양한 방역 방식을 비교하면서 각각의 역사적 맥락과 장소의 감각에 맞는 방역 방식의 바탕이 되는 더 좋은 민주주의와 대안적 문명을 상상하고 실천할 능력을 키우는 일이 절실하다.
이 과제를 감당하는 방편으로 이 책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중국 방역을 구미식 방역과의 대비라는 이분법적 시각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화 내지 상대화하는 자세로 분석하는 방식을 밟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중국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며 양쪽의 소리의 차이에 귀 기울여 보려고 한다.
2. 중국의 대응을 보는 외부 시각
중국을 보는 중국 밖의 시선에 영향이 큰 사유의 틀로서 먼저 동·서 문명 이분법과 그 밑바탕에 있는 문화주의이 크게 들린다. 오래된 이 프레임이 팬데믹 국면에서 여전히, 아니 더 노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구미인들에게 자신들이 ‘근대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이고, 동아시아는 ‘집단적이고 유교적인 권위주의의 사회’라는 패러다임의 위력은 여전하다. 이 패러다임은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위기의 국면에서 동아시아인을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데 일조했다. 동아시아인을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언어적 폭력을 넘어 물리적 폭력조차 종종 묵인되는 상황이다.
한편, 바이러스가 구미 대응책의 허점을 폭로하여 세계가 충격을 받은 것에 대비되어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일부 아시아 국가의 대응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면서 선진국 신화가 깨지고 있다. 이 현상은 2020년에 갑자기 돌출된 것은 아니다. 이미 ‘서양다움의 상실westlessness’이 2020년 뮌헨안보회의의 주요 의제가 될 정도로 그간 누적된 세계 변화의 일부이다. 팬데믹 사태는 그 추세를 극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 결과 ‘근시안적 동양 대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myopic east-west thinking’가 힘을 잃고 있다.이 책 124쪽 참조
그러나 동아시아의 대응이 초래할 수 있는 개인권 침해나 국가통제방식의 문제점도 지적되면서 이것이 유교문화의 집단주의나 질서중시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되는 문화주의적 해석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팬데믹 상황이 드러낸 동아시아의 ‘성공적 정치’를 긍정하면서도 그 공통점을 ‘유교적 정치 유산’에서 찾는 시각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유럽의 실패에 대비되는 동아시아의 성공에 주목하면서도,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 잘 막았을지 몰라도 ‘디지털 바이러스’, 즉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감시와 통제에 극히 취약하다는 점을 부각하는 주장이 주목을 끈다. 권위주의적 의식과 순응성, 그리고 개인적인 부족과 디지털 감시에 대한 비판의식 부재가 결합하여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미 실현된 디스토피아”와 같은 ‘디지털 생명정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주의적 해석은 ― 구미에서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이 있음은 뒤에 보게 될 터인데― “방역 조치들의 조건과 맥락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않은 채 문화적 습성”으로 규정될 법한 한계가 역력하다.
또 하나의 사유의 틀은 코로나19 사태를 지구화globalism, 곧 지구적 규모의 자본주의의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지금과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휩쓴 팬데믹인 스페인 독감은 코로나19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바이러스가 원인이고, 국가를 가리지 않고 전파되며, 많은 인구의 이동으로 숱한 사람들이 집단 감염되어 죽은 지구적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전쟁으로 병사와 노동자의 이동이 많던 그때보다 인구 이동이 (관광 등으로) 훨씬 더 활발하다. 그 동력은 다름 아닌 지구화이다.
바로 이 특징을 명료하게 짚어낸 것이 이 책에 실린 앤드루 류Andrew Liu의 글4장이다. 그는 코로나 바이러스 전파 경로와 세계 상업중심지의 분포가 일치하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특히 그 발상지인 우한이 중국근대사에서 교통의 허브‘九省通衢’로 명성을 누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연결망global market이 집중된 곳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실제는 ‘우한 바이러스’가 아니라 ‘글로벌 바이러스또는 Market Virus’라 불러야 옳다고 하며, 그 지구적 특성globality을 강조한다. 다시 활성화하는 국민국가와 코비드 민족주의의 강한 도전에 직면해 그 속도나 기능이 조정될 것이나 지구화 자체가 종식되지는 않을 테니 지구화라는 사유의 틀은 여전히 중요하다. 팬데믹 사태로 글로컬glocal한 관점이 새삼 주목되는 것은 그 증거이다.
그 밖에 팬데믹 국면에서 특히 부각된 권위주의중국식 용어로 ‘집권주의’도 위력이 큰 사유의 틀이다. 중국 밖에서 중국의 방역을 평가할 때, ‘최초 방역 실패와 최종 통제 성공’이라는 도식이 곧잘 활용되는데, 이 바탕에 바로 권위주의라는 틀이 자리한다.
우한에서 초기 방역의 실패와 그로 인한 희생의 진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박우2장는 역병의 최종 통제가 권위주의의 덕이라고 한다면 역병의 초기 확산 또한 권위주의의 산물임을 잊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중국은 현재 내치와 외교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권위주의의 강화 (또는 복귀)라는 가장 익숙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 선택이 어떤 또 다른 문제를 파생할지, 정권에 과연 효과적인 방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미 2017년부터 급격하게 악화된 한국 내의 중국에 대한 여론이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공격적으로 변한 양상도 보여준다.
그가 상대적으로 초기 단계에 초점을 둔 데 비해 좀 더 긴 시간대를 관찰한 하남석1장은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당국이 방역에 일차적으로 실패하면서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지만 3월 이후로는 안정세를 찾았음에 주목한다. 구미 국가들이 위기에 빠지면서 중국 체제에 대한 비판의 태도는 약해지고 자신감이 오히려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역과 경제 부문에서의 (상대적인) 성공의 뒷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 악화된 실업 문제나 지역적인 차별 문제 등에 대응해 어떻게 경제를 회복하고 민심을 회복할지를 중요한 과제로 주시한다. 언론자유의 문제는 물론이고, 방역의 민주적 토대나 사회적 지속가능성의 문제, 그리고 방역 과정에서 노동과 보건에 대한 평등하고도 보편적인 접근이 이뤄지고 있는지 따져보는 일을 숙제로 지적한다. 그러니 중국 방역모델이 바람직한 것인가, 혹은 향후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방역모델을 따라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국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방식을 쉽게 자기 사회에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영남3장은 ‘최초 방역 실패와 최종 통제 성공’의 실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중국 중앙정부는 2020년 1월 20일 코로나19에 대한 전면적인 대응을 결정한 이후 불과 2개월 만인 3월 20일 무렵 확진자 수를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국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중국의 정치 체제가 갖고 있는 장점이 잘 발휘된 덕이다. 물자와 인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권위주의 체제, 수차례의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로 형성되어온 위기 대응 능력과 체계, 2002년 사스 통제의 성공적인 경험이 중첩되어 작동했다.
그렇지만 중국의 ‘최종 통제 성공’을 과장해서 그 방역 방식이 세계적인 성공 모델이고, 다른 나라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라고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중국이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물적 대가를 지불했는지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종 통제 성공’에 대한 평가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 등과 비교해서 중국의 대가는 적다. 그러나 이는 정치 체제의 차이, 그에 따른 정책의 차이에서 빚어진 결과인 만큼 단순 비교는 적절치 않다. 게다가 ‘사후적 정당화’나 ‘결과론적 평가’만으로는 봉쇄 지역 주민들의 고통과 상처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 강조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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