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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수선,
자연의 플랜
자기조직화의 원칙
수리·수선이 곧 고도로 튜닝된 과소비 사회, 쓰고 버리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자연스러운 출구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원칙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시간이 시작된 이래 자연에 내재되어 있던 것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수리·수선의 과정은 무생물계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지만 생물계에서 비로소 이 메커니즘의 모든 힘이 전개된다. 이 시스템 뒤에는 스스로 조직하고 또 치유하는 힘이 존재하며, 이것 없이 생명은 생겨나지 못하고 또 단 1초도 유지되지 못한다.
자연의 플랜으로서 수리·수선은 이대로 사물 세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냉각 기능에 이상이 생기자마자 내장된 수리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자가수리 냉장고는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다. 냉장고 속 내용물 역시 ‘수리’될 수 있다면 더욱 근사하겠지만. 신선한 우유 2리터가 부족하고, 마멀레이드 병이 비어 있으며, 치즈도 다 먹고 없을 때 작은 오류 메시지가 뜨고는 곧 냉장고의 각 칸이 다시 채워진다. 그런 세상이라면 다시는 고장 난 커피머신이나 탈수가 안 되는 세탁기 때문에 짜증 낼 일도 없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지만 ‘순수한’ 자연에서 이는 아주 당연한 과정이다. 시스템이 손상되면 고쳐지고 재생된다. 상처가 낫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딘가 다치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고친다. 이것이 자기조직화의 법칙이며, 이는 무기물질의 세계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아주 놀라운 균질물질인 수정水晶은 성장한다. 수정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물리학의 규칙에 따라 스스로 자신을 조직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은 처음에는 무질서하게 일종의 모액母液, 그러니까 토마스 만이 《마魔의 산》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는 크리스털 용액 속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모든 삼차원의 공간에서 정확하게 같은 거리를 유지하며 세 방향에서 모든 주기적으로 제자리를 찾아 나간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 속에서 주로 결정질 형태로 존재하는 이 생명 없는 물질은 이렇게 ‘자기조직화’를 통해 구성되고, 우리에게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수도 있는데, 이러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사이 각각의 원자가 제대로 도킹하지 못하고 거리 유지를 잘못해 제자리를 못 찾게 되는 경우가 있다. 모액 안에서 잘못된 원자, 잘못된 분자가 되어서는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도와주세요. 나 엉뚱한 데 들어왔어요!” 많은 경우, 이러한 오류는 정확하게 바로잡힌다. 그렇지 않다면 1023개의 원자로 구성된 이 놀라운 수정 결정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10을 23번이나 곱한, 상상조차하기 힘든 엄청난 숫자다.)
이때 이 자기조직화를 통해 오류가 제거되고 수리·수선이 이루어진다. 하나의 결정結晶이 계속해서 ‘제대로’ 성장하려면 이를 구성하는 1021개의 원자가 제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만 한다. (특히 에너지 측면에서) 그렇지 않으면, 이 결정은 대부분 이를 ‘알아챈다.’ 자연계에서는 에너지 최소의 원리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나므로 이러한 결정은 각각의 원자에게 더 유리한 위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에너지 최소의 원리는 자연계상위의 법칙이다. 원자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를 찾을 때까지, 모든 삼차원의 방향에서 그곳을 찾아간다. 오렌지들을 상자에 넣은 다음 상자를 흔들어주면 오렌지들은 시장에 진열된 것처럼 상자 속에 빽빽이 들어찬다. 이렇게 빈틈없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상자를 흔들어줌으로써, 에너지 측면에서 불리한 위치들을 바로잡아 더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라는 결정 속 원자 역시 이와 똑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액체 속에서 열운동을 하는 입자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정들이 제 위치를 ‘알아차리고’ 약 38억 년 전 지구 표면에서 처음으로 질서 있는 구조로 생겨났기 때문에* (또한 질서는 생명 생성의 제1단계이므로), 영국의 화학자 그레이엄 케언스 스미스Graham Cairns-Smith는 ‘살아 있는 결정’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나로서는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이리라. 원자의 구성은 물리학의 법칙이며, 결정은 지표에서 최초로 생명이 생성되기 시작한 어떤 틀이며 생명 기원에 관한 여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전제다. 역시 더 나아가진 않겠다.
*지구는 45억 년 전에 형성된 후 뜨거운 화산 폭발과 같은 상태에서 오랜 시간 응축과 냉각기를 가졌으며 38억 년 전까지는 생물체가 존속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 기존 학설이다. 예전에는 이때부터를 지구의 지각이 생성된 지질시대로 정의했으나, 최근 지질시대 분류체계를 수정하면서 함께 고쳐졌다.
돈을 벌며 대학을 다니느라 지멘스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맡은 업무는 규소 결정을 배양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물리적인 과정을 이용해 결정 속에 아직 남아 있는 불필요한 오류 원자들, 이 ‘찌꺼기’들을 걸러내는 일이었다. 배양할 때의 오류를 고쳐서 최종적으로 순수한 규소 결정을 얻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지멘스, 바커, 반도체공업, 태양전지, 트랜지스터 할 것 없이 이렇게 불필요한 ‘찌꺼기’ 원자를 제거한 뒤 이후 공정에서 이에 필요한 다른 원자가 정해진 대로 결합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주변의 조건을 변화시켜 자기조직화와 에너지 최소의 원리가 정교하게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는 각 물질들이 가진 특정한 성질을 알맞게 재단하기 위한 과정이다. 반도체전자공학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었던 반도체 결정p형 반도체 혹은 n형 반도체의 도핑*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다.
*반도체 생산과정에서 주로 이용되는 도핑doping은 고유 반도체intrinsic semiconductor인 어떤 물질이 가진 순수한 전기적·광학적·구조적 특성을 조절하기 위해, 결정 제조과정에서 불순물(원소나 화학물질)을 의도적으로 첨가하는 일을 말한다.
원하는 성질을 지닌 새로운 산물을 생산하는 데 전제가 되는 모든 재료과학은 이렇게 물질의 구성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자연물질은 미세결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스로 결점을 보완해나가고 있다.
정리하자면, 자연은 오류를 범하며, 그 오류를 자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다시 고친다는 말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무기물은 이 수리·수선의 법칙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구상 모든 물질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빅뱅과 함께 시작되어 모든 별과 행성의 생성과 함께 계속된다. 약 40억 년 전에 이렇게 수리·수선되지 않았더라면 지구는 결코 만들어지지 못했을 테고, 지구의 열이 식는 동안 에너지 보존과 자기조직화, 수리·수선의 과정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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