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모의 옷장을 훔치는 게 정말 작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일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남의 대화를 엿듣고 몰래 재구성해서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어도 괜찮을까요? (…)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재료”로 여기고 사용해도 되는 걸까요?(154쪽)
제4장
유혹
─ 푸로스퍼로, 오즈의 마법사, 메피스토와 그 무리들
누가 지팡이를 휘두르고,
줄을 조종하고,
악마의 책에 사인을 하는가
(…)
하지만 이모의 옷장을 훔치는 게 정말 작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일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남의 대화를 엿듣고 몰래 재구성해서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어도 괜찮을까요? (…)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재료”로 여기고 사용해도 되는 걸까요?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개인으로든 직업군으로든 가장 악랄하고 경멸스러운 작가의 초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작가들이 직접 쓴 책이지요. 하지만 누구도 작가만큼 작가를 사랑하지도 않아요. 과대망상증과 편집증은 작가와 한 거울을 공유하지요. 파우스트로서의 작가는 거울을 보며 거만하고 사악하고 초인적인 메피스토펠레스이자, 마술의 대가이자, 운명의 지배자를 마주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인간들은 끈으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이거나 자신들의 마음과 내밀한 비밀을 그의 손바닥에 맡긴 바보 같은 존재들이에요.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로서의 작가는 같은 거울 속에서 떨고 있는 한심한 파우스트를 발견합니다. 영원한 젊음과 끝내주는 잠자리, 엄청난 부를 갈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보잘것없는 끼적임과 유치한 말장난그래놓고 뻔뻔하게 “예술”이라 부르지요으로 이런 바람을 짠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한심한 망상을 필사적으로 움켜쥔 파우스트 말이에요.
20세기의 작가들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어낸 부조리의 유령에 시달렸어요. 쉘리가 노래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강력한 시인’이 아니라, 엘리엇이 창조한 ‘우유부단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이 일반적인 작가의 모습이었지요. 혐오스럽고, 시샘 많고, 하찮고, 어리석은 작가가 등장하는 책이 쏟아져 나왔어요. 다음은 돈 드릴로가 《마오 II》에서 작가를 엉터리 괴짜로 묘사한 부분입니다. 한 편집자가 작가에게 그의 책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랫동안 작가들이 하는 말과 유식한 푸념을 들으면서도 행복했지. 가장 성공한 작가가 가장 불평이 많더군. (…) 최고의 작가가 되게 하는 자질이 터무니없이 기발한 불평을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글쓰기는 신랄함과 분노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글쓰기가 신랄함과 분노를 낳는 것일까? (…) 외로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룬다고, 낮에는 걱정과 고통으로 굳어 있다고 난리야. 안 됐지, 안 됐어. (…)”
“힘드시겠어.” [작가가 말한다.] “매일같이 그런 비참한 놈들과 일하려니.”
“아니야, 쉬워. 그 친구들을 좋은 식당에 데려가면 돼. 드셔, 드셔, 드셔, 드셔, 그러는 거지. 마셔, 마셔, 마셔, 그래. 자기들 책이 체인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린다고 말해주는 거지. 독자들이 서점으로 몰려든다고 하는 거야. 그러곤 오구 오구 오구 (…) 하면서 미니시리즈 판권도 관심 있고, 오디오테이프 판권도 관심 있고, 백악관도 서재에 책을 한 권 두고 싶어 한다고 말하는 거지.”
다음은 메이비스 갤런트의 단편소설 〈고통스러운 일〉에서 영국인 작가 프리즘이 프랑스 작가 그리프에게 그의 의중과 달리 왜 런던에 와서 살면 안 되는지 편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프리즘은 이렇게 썼다. 파리에서는 그리프를 한눈에 문학과 관련된 소일을 하는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볼 터였다. 누구도 출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을 터였다. 적어도 그의 면전에 대고는. 오히려 그리프는 일찍이 파리 보헤미안의 꽤 높은 봉우리에 뚝 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오스만 거리의 백화점에 걸려 있는, 기계로 짠 니트와 캐시미어 블레이저는 물론, 5천 프랑짜리 맞춤 제작된 양복이 내려다보이는 곳 말이다. 하지만 계급 제도에 대한 표식이 완전히 다른 영국에선 포주나 마약 밀매자로 오인받아서 버스 정류장에서 총에 맞아 쓰러질지도 몰랐다.
프리즘과 그리프는 둘 다 허영심이 많고 평판에 매우 민감합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건수가 생기면 서로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아등바등하지요.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 《정보》도 비슷합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섬뜩한 남자와의 짧은 인터뷰》에 등장하는 ‘작가’ 캐릭터들처럼 그 이후에 나온 훨씬 많은 작품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자기혐오는 왜 발생하는 걸까요? 아마도 (낭만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이미지와 현실의 격차 때문일 겁니다. 영예로운 사자死者이자 문학의 거인들은 이 비쩍 골아 약해빠진 후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래는 A. M. 클라인이 현대 시인의 수치스런 존재감 상실에 대해 노래한 시입니다.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사라졌다는 것,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
흔적이 남아 있다면 고작 통계자료,
이를테면 누군가의 투표, 아마도 갤럽 여론조사에서
누군가 던진 비웃음, 정부 위원회의 점 하나.
하지만 소리치는 군중, 누군가의 한숨에서 그는
느껴지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오, 자신의 두루마리에서, 왕자의 인용문에서
연단에 퍼지는 큰 울림에서 우리의 문화를 펼쳐냈던 그,
한 이름으로는 천국을,
다른 이름으로는 일곱 고리의 연옥을 노래하던 그,
그가 지금도 존재한다면, 숫자이고, 미지수일 것이다.
익명의, 길 잃은, 누락된,
호텔 장부의 어떤 스미스 씨일 것이다.
참고로, 이런 정신적 상처는 주로 남성들이 입었지요. 여성 작가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으며, ‘천재’라는 메달을 별로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실 ‘천재’라는 단어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보통 어울려 다니지 않아요. 남성 ‘천재’들이 하는 기이한 행동을 여성이 하면 보통 ‘미쳤다’는 꼬리표가 붙거든요. 심지어 ‘재능 있는’ ‘대단한’ 같은 단어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사회에 실제로 영향을 끼쳐놓고도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야심을 시인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날 여성 작가들은 그들의 힘이 감소했다거나 세계 무대에서 위신이 낮아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에 걸출했던 여자 선배들과 비교해 자신들이 아주 허약하다고 여기지 않지요.
지금부터는 고상하게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하는 정체성을 대체할 또 다른 정체성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자기 인식의 위기에 대해 논하려 합니다. 그중 하나는 예술과 돈과 권력이 엇갈리는 독특한 교차점과 관련이 있고, 나머지 하나이것도 앞의 것과 무관하지 않지요는 ‘도덕적 책임’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이 있지요.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통제하며 예술가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돈과 힘’이라고, 예술가가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지점은 ‘도덕 및 사회적 책임’이라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질문은 아주 짧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 영혼을 팔았는가? 만약 그랬다면 얼마에 팔았고, 누가 샀는가? 영혼을 팔지 않았다면 누가 예술가를 껍질 무른 게처럼 짓밟는가? 영혼을 판 대가로 예술가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우스갯소리 하나를 볼까요.
악마가 작가에게 와서 말한다. “내 너를 네 세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가로 만들어주마. 세대가 무어냐, 이 세기에 최고로, 아니, 천년을 통틀어 최고로 만들어주지! 최고만이 아니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부자로 만들어주겠다. 거기다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네 영광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해주마. 네가 할 일은 내게 너의 할머니, 어머니, 아내, 자식들, 강아지, 그리고 네 영혼을 파는 것이다.”
“좋아요.” 작가가 답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펜 주세요. 어디에 사인하면 될까요?” 그러다 그가 머뭇거린다. “잠시만요.” 그가 말한다. “그러면 전 뭘 내드려야 하죠?”
작가는 악마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사탄이 사막에서 예수를 유혹하며 약속한 것처럼, 이 계약서에는 세속적 권력을 쥐어주겠다는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가 정말 이런 힘을 얻는다면 얼마만큼 권력을 휘둘러야 오용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요? 사회적 책임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형제를 지키는 보호자인가?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책임지는가? 자신의 예술적 기준을 어기고 설교자가 될 의향이 있는가? 중요한 메시지보통은 타인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주입하기 위해 기꺼이 2차원적 이미지를 조작하겠는가?
그리고 혹시 형제는 내팽개치고 상아탑에만 틀어박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이마에 낙인이 찍힌 살인자 카인이 되는 건 아닐까그냥 살인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형제라는 관점에선 형제를 죽인 자이지요?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범죄가 발생하는 데 영향을 미칠까?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젠가 이런 질문들에 부딪치게 됩니다. 어쩌면 질문이 아니라 ‘난제’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우선 예술 작품의 내용과 도덕적, 사회적 책임 문제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봅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지요. 하지만 작가가 책에서 사람을 살해하면, 그러니까 미적으로 뛰어난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완벽한 살인에 집착하는 인물을 그리면(앙드레 지드의 《교황청의 지하실》에서처럼요) 무슨 죄가 될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 죄를 판단해야 할까요? ‘문단이 얼마나 감미로운가’ ‘구조가 얼마나 대칭적인가’ ‘은유가 적절하고 독창적인가’ ‘플롯 말미에 만족스런 한 방이나 역설적 슬픔이 있는가’처럼 단지 미학적 기준으로만, 예술 작품으로만 평가해야 할까요?그렇게 할 수는 있을까요? 혹여 그의 지면 위 살인이 누군가에게 진짜 살인을 하도록 영감을 준다면 어떻게 할까요?
작가는 도덕적 법 위에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루하고 우둔하고 재능 없는 지극히 평범한 대중은 지켜야만 하는 평범한 규칙을 작가는 전혀 적용받지 않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인 걸까요? 한편 글쓰기가 예술 작품으로서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작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을 창조해낸 작가가 드러낸 건 어떤 자아일까요? 별로 훌륭한 자아는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껏해야 부도덕한 자아, 최악의 경우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괴물이라고 여기겠지요.
하이 모더니즘과 하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섬기는 최고 사제인 수전 손택은 초기에 쓴 자신의 반전통적 에세이에 대해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강렬한 자기 모독을 저질렀다. (…) 그 에세이들은 근엄했을 뿐 아니라, 확실히 금욕적이었다. 마치 내가 내 상상력의 관능성을 믿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길을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선한 것들,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들을 지지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건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사고의 틀은 언제나 도덕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바로잡는 것”, 아 그렇습니다. 모든 부모가 예술의 그런 유익한 기능을 간절히 원하고, 북미의 모든 교내이사회가 그 기능에 동의하고, 그중일부는 그런 합의를 검열의 구실로 사용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바로잡는다”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걸까요? 그러니까 사람을 바로잡고, 또 일부 사람들이 유해하다고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는 걸까요?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아주 긴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플라톤인데, 그는 《국가》에서 시인이 뱉는 말은 거짓이라면서 이상적 국가에서 시인을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책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불에 태웠던 비극적인 역사도 이와 관련이 있고, 파트와이슬람법에 저촉되는 사안들을 해석해놓은 권위 있는 이슬람 판결이다―옮긴이와 교황이 작성한 금서 목록도 연관이 있지요. 작가의 이모가 조카의 신간 소설에 등장하는 방탕한 매춘부가 자기인 것 같다며, 자기는 그런 짓을 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자신에게 그럴 수가 있냐며 대화를 차단하는 일 같은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모의 물결 같은 머리 모양과 1945년 스타일의 허리 잘록한 정장을 훔쳐다가 완전히 다른 허구의 인물에 갖다 붙인 것에 대한 앙갚음인 거지요.
하지만 이모의 옷장을 훔치는 게 정말 작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일까요? 버스 정류장에서 남의 대화를 엿듣고 몰래 재구성해서 자신의 문장에 집어넣어도 괜찮을까요?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 〈재료〉에서 아내에게 “도덕관념 없는 추잡한 멍청이”라고 불리는 작가 휴고처럼,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재료”로 여기고 사용해도 되는 걸까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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