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편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인사드립니다
지난 주말은 여름처럼 무더웠는데, 이번 연휴는 첫날부터 비가 내리네요. 심지어 쌀쌀하고요. 그래도 저희 집 고양이 냐아옅은 갈색 줄무늬, 7세는 여전히 복슬복슬합니다. 방금 전까지 뭐라 뭐라 하며 밀크티 색 오른쪽 앞발로 제 허벅지를 두드렸습니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는 냐아가 놀아달라고 조르는 시간입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지 불러도 돌아보지 않지만요.
자, 약 반년 전인 2018년 11월로 돌아가볼까요.
몸과 먹을거리의 관계를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고찰하는 워크숍 ‘몸의 슐레schule, 학교’를 준비하며 우리는 이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때 미야노 씨가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의사에게서 들었다고 말했지요. 그 순간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미야노 씨가 유방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2018년 9월에 열렸던 ‘문예공화국 모임’재야연구자 사카마키 시토네가 주최하는 모임으로 학자와 학자, 학술계와 대중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합니다.의 행사 뒤풀이에서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저는 내심 미야노 씨의 암은 나을 것이라고, 갑자기 악화되진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미야노 씨가 담담하게 말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예전에는 암을 불치병이라고들 했지만, 지금은 의료가 발전해서 많은 암 환자들이 증상이 완화되거나 완치되어 건강히 살 수 있다.”라고 하는 암 전문가와 당사자들의 말에 제가 계몽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암에 걸린다고 반드시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그래프나 통계 수치도 있었고요.
‘수전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저는 암을 ‘정보’로 접할 때 막연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암에 대한 인식이 그 수준이었기 때문에 “다발성 전이가 일어나 좋은 상태가 아니다.”라고 들었을 때도 ‘다발성 전이? 그게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구글에서 검색해보았는데 글자로 쓰인 정보밖에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발성 전이’의 연관 검색어를 통해 많은 이들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를 함께 찾아본다는 것. 정작 남은 생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가 있는 사이트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검색하는 건 그만두었습니다. 다발성 전이가 무엇인지 글로 공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에게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라는 얘기를 들은 미야노 씨가 유료 강연의 강연자로 나서도 될지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잠깐 고민했습니다. 미야노 씨가 갑자기 아프면 무엇이 곤란해질까? 그리고 애초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히 찾았습니다. 미야노 씨가 아프면 신청자들에게 강연 취소를 공지하고 입장료를 환불해주면 됩니다. 사실 곤란한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단순히 절차와 수고가 늘어날 뿐입니다. ‘몸의 슐레’ 신청자들은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은 분들이 많으니 강연자의 건강 문제로 강연을 중지한들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뒤에서 도와주는 사무국의 하야시 리카 씨 역시 흔쾌히 수고를 감수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줄 분이고요.
문제는 두 번째 의문입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의사가 미야노 씨에게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라고 전한 것은 의사로서 100점짜리 정답이었겠지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확률 속에서 살아가진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요일 저녁 6시부터 강의를 한다든가, 5월 19일 학회가 있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예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 예정 속에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질 가능성’을 집어넣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생각할 지점은 더 있습니다. 미야노 씨가 아니라 제가 갑자기 아플 가능성도 0퍼센트는 아닙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 돌연히 뇌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가능성을 품은 채 살고 있습니다.
확률이란 모집단 내에 경향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아무리 증거에 기초해 병세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를 받은들 실제로 악화된 환자들 속에 미야노 씨가 포함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낮은 확률이지만 미야노 씨가 아무렇지 않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둘 확률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이 적으나마 분명히 존재합니다. 제가 그런 소수파에 포함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저와 미야노 씨가 다른 점은 생각보다 별로 없습니다. 그에 덧붙여 만약 제가 갑자기 아프면 강연회는 어떻게 될까요? 주최자가 갑자기 아파도 참석자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병세가 악화될 가능성을 들은 미야노 씨’가 진짜로 상태가 나빠졌을 경우와 비교해보면 거의 다르지 않지요.
게다가! 게다가 말입니다. ‘갑자기 아프면 안 되니까’ 강연을 취소했는데, 만약 당일에 아무렇지 않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아무 일도 없었지만, 혹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니 안 하길 잘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될까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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