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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백 년 동안 느낀
위화감
놀라운 사상
이제 농촌에는 논을 가는 소도 말도 없습니다. 저도 소 대신 경운기에 끌려서 논을 갈아엎습니다. 편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소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도 없고 소여물을 베러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작년부터 돌보기를 그만둔 인근 논에는 잡초들이 코앞까지 뒤덮여 오고 있습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경사면에도, 폐쇄된 귤 농장에도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논에 나가도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하물며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야요이시대에 이 마을에서 농사가 시작된 이래, 농민의 마음이 가장 무기력하고 농지는 가장 황폐하고 시골 풍경이 가장 망가지고 생명체가 가장 적은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농민들의 생활이 개선되고 농촌이 번영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행해온 일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매일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회의 발전 방향이 농사와 맞지 않는다는 감각은 최근에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근대화·자본주의화는 농사가 걸을 길이 아니다’라고 느낀 농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본주의자라고 불렸습니다. 이미 다이쇼시대로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대략 1910년대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를 말함―역주, 당시의 농본주의자들도 이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놀라운 사상이 농촌의 농민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다치바나 고자부로橘孝三郎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 대표적인 발언입니다.
“농사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농사는 천지자연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상으로서 사회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것은 외래의 것이고 농민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농본주의자들은 농사일과 농민의 생활 속에서 비롯된 자본주의에 대한 위화감과 혐오감을 사상으로 만들어 사회를 견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사農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심했습니다. 그들이 느낀 위기감은 보통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왜 농사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가, 왜 근대화해서는 안되는가’라고 생각하는 농민은 소수였습니다. 현대에도 그러합니다.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마을에서 천지자연의 품 안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것을 바라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전의 농본주의자들의 일부는 일신의 행복을 버리고 자본주의 타도를 목표로 혁명을 위해서 봉기했습니다5·15 사건. 그러나 농사꾼이 테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좌절했고, 전후에는 그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그로부터 이미 8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국민의 반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 수도 지금은 겨우 2퍼센트입니다. 예전에는 국부의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생산액은 지금은 국내총생산GDP의 1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치들로는 농사의 진정한 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농사의 위기가 농민들만의 위기라면 보호나 보상 등의 대책을 마련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농사가 사회의 모체라고 한다면, 이러한 위기는 우리 사회의 토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 됩니다.
농본이란 무엇인가
의외로, 쇼와 초기의 농본주의자들은 ‘농본주의’라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치바나 고자부로는 ‘농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이유로, “사람들의 의식은 시대의 지배를 받기에 땅으로부터 생겨난 사상에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농촌에서 농사꾼에 의해 땅으로부터 태어난 사상은, 설혹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농민의 개인적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마을의 밖으로부터, 농민이 아닌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져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치바나가 ‘농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였습니다.
“인간은 농사農를 기본으로 천지자연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며, 미래에도 영구히 그럴 것이다.”《농본건국론》, 1935
저는 “농사農를 기본모체으로”라는 이 말에 감동합니다. 그가 말하는 “천지자연의 은혜”라는 것은 식량만이 아닙니다. 천지 속에서 일하는 것, 자연환경과 지역사회, 전통문화도 포함합니다. 다치바나는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여기에 농본주의자의 관점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천지자연의 은혜는 농사가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받을 수 있고, 또 그것을 받게 해주는 농사가 있기 때문에 은혜가 된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농본’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잃어버렸지만, 인간이 본시 갖고 있는 감각입니다.
지금까지 위정자들이 입에 올려온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식의 말에는 이러한 감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자본주의나 근대화에 맞서고자 하는 기개는 티끌만큼도 없고, 농사를 외부로부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껍데기만 있을 뿐입니다.
메이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농사와 근대화가 서로 맞지 않는 원인을 찾으려면 메이지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농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여러 가지를 개선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부로부터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는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천지자연이 급격하게 변하는 일도 없었습니다.에도시대1603~1867를 통틀어 수확량은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메이지시대부터 시작된 ‘근대화문명개화’는 외부로부터 촉발된 것입니다. 농민들이 원해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까지 농민들은 ‘해충’이라는 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메이지 이후에 해충을 구제하는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서 농학자들이 농촌에 퍼뜨린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당시의 농촌에서 ‘구제·방제’라는 사고방식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그때까지는 천지자연의 은혜는 물론이고 재해도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천지자연도 있다, 즉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기술이 있고, 그 기술이 농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주장이 새로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급하는 근대국가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러한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연의 제약’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극복하고 돈이 되도록 생산을 늘리는 것이 농업의 사명이라는 식이 되어 있습니다. 농업이 다른 산업에 비해 뒤처져 있다고 비판받지 않도록 더욱더 생산성을 높여서 농업도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채찍질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쯤에서 한번 멈추어 되돌아보지 않으면 위기의 깊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대화자본주의화가 농촌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말기가 되어서였고, 본격적으로 농사에 개입하게 된 것은 전후戰後의 일입니다. 또한 농민들의 생활과 정신에까지 침투해서 가치관을 크게 전환한 것은 1960년대였습니다.
예를 들어, 1965년경까지는 농민들은 벼나 채소를 ‘만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둔다’, ‘영글었다’고 말했습니다. “올해는 벼를 꽤 거두었다”, “잘 영글었다”고 말했지, “잘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이 바뀐 것은 자본주의가 농민과 천지자연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나서입니다. 농사가 농업기술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변화시킨 것입니다.
농사의 산업화는 마침내 농민들의 심리를 천지자연으로부터 은혜를 받는다는 차원에서 자연의 제약을 극복하여 먹거리를 만든다‘라는 단계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진보‘라고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오는 데 100년이 걸렸습니다만, 실은 큰 잘못을 저질러온 것이 아닐까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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