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017년 3월, 나는 은주가 가라앉은 아중 저수지를 찾았다. 전주 외곽에 위치한 저수지는 가끔 조깅하는 어르신들과 산책하는 중년 부부가 눈에 띌 뿐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나는 은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다는 카페에 가보았다. 저수지 바로 앞에 위치한 이곳에서 은주는 20여 분 정도 앉았다 오후 5시 40분쯤 저수지로 향했다.
은주가 앉은 자리는 밖이 잘 보이는 창 쪽이었다. 하지만 창문 밖으로는 가파르게 솟은 둑이 시선을 가로막고 있어 저수지 수면이 보이지 않았다. 그 벽을 바라보며 은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학생 건강 및 안전 사항에 특이점 없음. 근로시간 및 임금은 표준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음. 동료 직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함. 학생 적성도 잘 맞아 향후 취업 연계 가능성이 있어 보임. 실습 중 고객 응대에 어려운 점이 있어 보이나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함.
은주를 면담한 후 학교 담임선생이 작성한 “순회 지도 결과 복명서” 내용이다. 담임선생은 은주의 ‘산업체 적응도, 현장실습 만족도, 업무 파악 정도’ 등에 모두 10점 만점을 줬다. 또 상·중·하로 나눠 평가하는 ‘건강 상태’, ‘근로시간과 임금’, ‘복지와 후생’, ‘취업을 통한 성장 가능성’도 모두 ‘상’으로 평가했다. 은주가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난 12월 21일에 진행한 면담 결과였다.
해를 넘겨 다시 1월 9일에 진행된 면담에서도 결과는 동일했다. 건강 상태도 ‘상’, 산업체 적응도도 10점 만점이었다. 평가 내용도 거의 흡사했다.
학생 건강 및 안전 사항 특이점 없음. 근로시간 및 임금은 표준협약을 잘 이행하고 있음. 업무 스트레스가 약간 있으나, 극복하려 하며 잘해 보겠다는 의지가 강함. 팀 내 분위기가 좋아 동료들과 개인적인 만남이 많다고 함.
하지만 은주는 이 면담을 하고 13일 만에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은주에게는 각각 다른 월급액을 명시한 두 개의 계약서가 존재했다. 실습 나가기 전인 2016년 9월 8일 체결한 ‘현장실습 표준계약서’를 보면 월급은 160만5000원이지만, 6일 뒤 실습 업체와 체결한 근로계약서에는 1개월113만5000원, 2개월123만5000원, 3개월128만5000원, 4~6개월133만5000원, 7개월차 이후134만5000원를 차등해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현장실습 표준협약서는 학생·업체·학교 삼자 간 협약으로 되어 있다. 실습생의 업무 조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학교에서 개입할 여지를 열어 둔 것이다. 반면 근로계약서는 학교를 배제하고 학생과 업체 간 일대일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실습생을 대상으로 하는 근로계약서는 2012년 4월, 현장실습생의 노동조건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으로 도입됐다. 사실상 취업과 연계돼 현장실습이 이루어지는 경우, 표준협약과 동시에 근로계약을 체결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현장실습생이 사업장의 다른 노동자와 동일하게 일할 경우, 현장 실습생에게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로계약이 표준협약보다 불리하게 맺어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은주의 경우도 그랬다.
일선 현장에서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면서 “회사 사정에 의해 부득이한 경우” 같은 단서 조항을 넣어 표준협약서를 무력화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표준협약서보다 후퇴한 근로계약서를 적용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어 “회사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표준협약서에는 월급 160만원이 명시돼 있으나 근로계약서에는 120만 원을 주기로 했으니 120만 원을 준다는 식이다. 게다가 은주는 근로계약서상 명시된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은주의 월급 통장에 찍힌 금액을 보면, 1개월째에는 86만4520원, 2개월째에는 116만362원, 3개월째에는 127만2900원을 받았다.
사실 이럴 때 회사는 법률상 표준협약서대로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복수의 계약이 존재할 경우, 노동자에게 유리한 계약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 신분으로 소송까지 감내해야 한다. 노동법이나 현장실습 표준협약조차 알지 못하는 고등학생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을까.
결국 이런 문제점은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은주와 관련해서 학교와 교육청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담임교사는 은주가 일하던 업무 현장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없었다. 업체에서 꺼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은주와의 면담은 모두 작업 현장이 아닌 곳에서 진행됐다. 그나마도 은주가 근무한 5개월 동안 단 두 차례뿐이었다. 학교측은 은주가 LG유플러스 하청업체에서 “욕받이 팀”으로 불리는 세이브팀에서 일한 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면담에서 은주가 내비친 구조 신호를 알아듣지 못한 건 당연했다.
*
은주와 같이 상담사로 일했던 다른 학생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당시 LG유플러스에 일하던 실습생은 10명이었다. 2016년 한 해 동안 이곳에 33명의 학생이 들어갔으나 22명이 그만뒀다. 그만둔 학생들은 소명서에서 업무 부적응“일이 힘들다”, 자진 복교“학교로 다시 가고 싶다”, 재취업“다른 곳에 취업하고 싶다”을 이유로 선택했다.
전라북도교육청이 운영하는 상담 센터인 전주덕진위센터는 은주가 숨진 지 한 달여가 지난 2월 15, 16일 양일간 LG유플러스 전주고객센터 현장 실습생 9명1명은 면담 제외을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했다. 이 내용을 보면, 현장실습생들은 감정 노동에 따른 스트레스와 실적 달성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상담을 진행한 상담사는 9명 중 6명이 스트레스에 노출돼 있다고 진단했다.
상담사의 면담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B학생: 고교 시절 진로 희망은 대학교에 진학해 연출을 전공한 뒤 작가, PD가 되는 게 꿈이었으나 경제적인 상황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고, 일이 익숙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함. 전화를 받다 모르는 게 있으면 주변에 물어봐야 하는데 다들 바쁘기에 물어보기가 곤란한 상황. 또한 고객들이 물어보는 질문들이 매우 다양해서 거기에 맞는 답을 찾기가 어렵다 함. 아직 전화 받는 게 익숙하지 않고 전화 업무를 6시에 끝내도 통화 중 바로바로 해결하지 못한 일을 처리하면 6시 퇴근이 어렵다고.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함부로 하는 고객들을 만나면 당황스럽고 대처가 어렵다고 함.
D학생: 입사한 지 7개월 정도 됐지만, 직업에 대한 의미 부여가 없고 ‘목표 없이 그냥 막연하게 계속 다녀야 할지’ 답답해 함. 입사 동기 네 명 모두 퇴사한 상태여서 자신도 퇴사하고 싶은 생각에 갈등. ‘호텔리어’가 되고 싶어서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함. 올해 수시 전형을 보고 싶으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까봐 걱정. 업무와 팀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감, 자신을 무시하는 고객을 응대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스트레스, 고객을 상대하면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있었음.
아이들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른들은 무엇을 했을까?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