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무 번
올여름은 옥수수를 많이 먹게 될 것 같다.
옆집과 우리집 사이에 옥수수밭이 있었다. 몇 개쯤 서리하는 게 티나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밭이었다. 어림잡아 일만 평은 되는 것 같았다. 일만 평이나 거리를 두었으니 옆집이라 하기에는 다소 멀지만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이긴 했다.
이삿짐을 풀던 날 밤, 찜질방 주인이 옥수수를 가지고 왔다. 중국 음식점에 배달을 부탁했는데 멀다고 거절당해서 난감하던 차였다. 사람을 들이기 마땅치 않았지만 아내는 잠깐이면 되겠다 싶었는지 문을 열어주었다. 방금 삶은 옥수수 단내에 혹해서였다. 우리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남자가 운영하는 숯가마 찜질방은 집에서 마을 쪽으로 삼 킬로미터쯤 내려가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아홉 가지 볼거리가 있어 구곡이라 불리는 계곡과 함께 신라시대 고찰도 있어서 한때는 휴가철이면 제법 관광객이 몰려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계곡 가까운 곳에 워낙 펜션이 많이 생겨 그런지 손님이 뚝 끊겼다고. 그래서 한여름인데도 숯을 피우는 대신 이렇게 옥수수나 삶아댄다고 주인이 앓는 소리를 했다.
옥수수는 맛이 괜찮았다. 주인이 찜질방 뒤쪽 채마밭에서 직접 키웠다는데 통이 가늘고 알이 듬성듬성했지만 무척 차졌다. 주인이 짐 쌓인 거실을 슬쩍 둘러보며 아직 젊은데 어떻게 여기로 이사를 왔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옥수수를 먹으며 치매를 앓는 아버지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주인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이곳이 고향인지, 아버지를 직접 돌보는지 하는 질문을 두서없이 던졌다. 아내는 얼결에 대답한 것을 후회하는지 못 들은 척 옥수수만 먹었다.
주인이 개의치 않고 도시에서 이런 산골로 오는 사람은 대개 건강상의 이유로 직접 재배한 채소를 저염식으로 먹을 작정이거나 도립공원 끝자락을 병풍으로 삼으려는 호사가뿐이라고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라고 말문을 열어 아버지를 모시는 아내를 치하하려나 했더니 손님 없는 거대한 찜질방을 버리지도 팔지도 삶아먹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참고 들었다. 아내나 나나 질문이 많은 사람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 낫다고 여겼다. 대답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듣고만 있으면 그럴 일이 없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주인은 한참 혼자 떠들다가 우리가 잠자코 있는 걸 의식했는지 이 넓은 집에 단둘이 사는지, 부모님은 어느 요양원에 있는지, 부모를 돌보는 한편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지 물었다. 아내는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쟁반을 씻어서 돌려드리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 틈을 타서 근처에 배달이 가능한 식당이나 슈퍼마켓이 있는지, 약국과 병원은 어디인지 물으며 화제를 돌렸다. 눈치가 둔한 건지 말에 주린 건지 주인은 질문을 받자마자 식당 몇 곳과 인근 소매점, 약국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러고는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지루한 전도가 시작되리라 여겼는지 아내가 소리 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주인은 신경쓰지 않고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대뜸 전도사를 조심하라 일렀다. 인근에 옥황상제를 섬기는 종교의 총본산이 있는데, 시커멓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헌금을 뜯는다고 했다. 말벗이나 할 겸 문을 열어주었다가는 곤란해진다고 충고했다. 한번 들이면 두 번째는 명분이 없어 다시 들이게 되고, 그러다보면 제집처럼 드나드는 걸 당연히 여긴다고. 일단 안으로 들어오면 찬송을 불러대고 주술 같은 기도문을 외고 기어이 헌금을 받아야 돌아가는데, 그렇다고 상대하지 않으면 종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거나 문가나 찜질방 입구에 목석처럼 서서 기도문을 왼다고 했다.
“손님들이 찜질하러 왔다가 종교 집회 하는 줄 알고 그냥 돌아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벌레 같다니까요. 하루살이요. 종일 눈앞에서 얼쩡대며 귀찮게 굴잖아요. 그러니 한 대 때려서라도 쫓아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주인이 동의를 구하듯 쳐다봤다.
“때렸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글쎄요. 저희야 잘 모르죠.”
아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만 가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언짢은 표정으로 아내를 쏘아보다가 건성으로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며칠 후 점심을 먹고 막 치우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따분하게 차려입은 여자 둘이 대문가에 서 있었다. 마당으로 나서는 나를 보더니 두 사람은 곧장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찜질방 주인이 조심하라던 전도사들 같았다. 길짐승을 쫓듯 저리 가라고 크게 손짓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은 푸대접이 익숙한지 꿈쩍하지 않았다. 문가에 선 채로 노래 부르고 손을 모아 기도하고 만세를 부르고 다시 기도하고 노래하고 큰 소리로 경전을 읽었다. 아내나 내가 조금이라도 거실창 가까이 가면 소리를 질러 말씀을 전하려 했다.
“옥황상제는 우리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십니다. 매년 행실을 평가해 상을 내리세요. 행태를 다 보고 계십니다. 옥황상제는 언제나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키득거렸지만 언제까지고 집안에서 비웃으며 버틸 수는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보면 살림을 추려왔음에도 어째서인지 버려야 할 게 또 생겼다. 여자들은 내가 쓰레기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옥황상제가 다 보고 있다고 소리쳤다.
“옥황상제가 그렇게 한가해요?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지켜봅니까?”
“누가 그걸 일일이 보나요. 다 보실 필요도 없지요.”
나이 지긋한 여자가 상냥하게 대꾸했다.
“식구들은 서로서로 행태를 관찰하지요.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죠. 그것이 매년 황제의 귀와 눈에 들어갑니다. 황제는 보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잘 모르겠네요. 관찰할 식구가 없으니까요.”
무슨 그런 농담을 하느냐는 듯 여자들이 실없이 웃었다.
“이렇게 좋은 집을 가진 걸 보니 황제께서 복을 많이 내리셨습니다.”
“동네에서 제일 싼 집이에요.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입니다.”
“그럴수록 빨리 황제 복을 받아야지요. 그래야 집도 사고 땅도 사지요.”
여자가 능숙하게 대꾸하고는 가방에서 책자를 꺼냈다. 오래 박대받은 경험으로 어떤 불리한 말을 들어도 대충 얼버무리게 된 모양이었다.
책자에는 알록달록한 천상계를 배경으로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의 옥황상제가 그려져 있었다. 읽어보기를 당부하며 여자가 책자를 내밀었다. 나는 뿌리쳤다. 책자와 함께 여자가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자를 밀친 꼴이 되었다. 아내가 거실 커튼 틈으로 지켜보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여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식구들이 행태를 관찰한다고.
나는 사과하는 대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시늉을 했다. 넘어진 여자가 다른 여자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황제가 보고 있다고 엄히 꾸짖듯 말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황제가 눈살을 찌푸릴 것 같아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인상을 쓰며 옥황상제가 보고 있는데 무슨 불경한 짓이냐고 눈을 부라렸다.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 지나서 이번에는 남자와 여자가 나타났다. 옷차림이 단조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작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얼핏 성경책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종교 전도사가 방문한 줄 알았다.
그들은 보안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우리가 멀뚱히 쳐다보자 남자가 울타리 쪽으로 다가와 아내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우리는 고객을 지켜드려요.”
“지켜요?”
아내가 되묻자 남자가 대꾸했다.
“재산과 목숨이요. 우리 회사에서 하는 일이죠.”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이 아니라 목숨이라니. 절박하고 간절해 보여서 웃음이 났다.
아내가 내게도 명함을 보여주었다. 생소한 이름의 보안 회사였는데 낯선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유니폼에 붙은 촌스러운 알파벳 로고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소형차에도 로고가 붙어 있었다.
전도사들에 비하면 보안 회사 직원은 무해해 보였다. 우리가 원하면 굳이 몸을 밀치거나 넘어뜨리지 않아도 곧 돌아갈 듯했다.
아내는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이삿날 아내는 이 집에 제일 필요한 게 경찰이라고 농담했다. 보기에는 나쁘지 않아도 치안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울타리와 대문, 집 뒤편을 둘러싼 무성한 숲, 구불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골짜기, 인적 드문 비포장도로를 언급하면서. 치안은 운이나 재수에 달린 문제라 집의 위치나 구조와는 무관하다고 말해보았지만 아내는 잠금장치를 늘려야 한다고 대꾸했다.
중개인은 이 집을 전망이 빼어나고 호젓한 별장지라고 소개했다. 도시에서 그 말은 강이 보인다는 뜻이었지만 여기서는 휑하다는 의미인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사방이 나무와 옥수수지만 수확이 끝나면 나대지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아내는 몇 차례 호흡곤란 증세를 겪었고 그게 이사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이사 후 며칠간은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온 듯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매듭 묶는 법이나 빗물을 받아 식수로 쓰는 법을 배우고 텐트에서 등이 배겨 잠을 설쳐도 피로한 줄 모르는 캠프 말이다. 갈증과 모기에 고투하며 생존법과 구조법을 배우지만 일단 집에 돌아가면 그간 불편을 참아가며 배운 것들은 하나도 써먹을 데가 없어진다. 고생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여자가 양해를 구하더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순식간에 집의 대략적인 형태를 그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집을 둘러보면서 창의 위치, 잠금 방식 등을 노트에 표시했다. 사방을 살피며 그렇게 한 후 다시 현관 앞에 서서 정면, 좌우 측면을 측량하듯 절도 있게 돌아보았다. 보안업체 직원이라기보다는 주택 시공업자처럼 보였다. 남자가 우리에게도 노트를 보여주었다. 다소 거칠지만 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낸 그림이었다. 오른쪽 뒤편에 창고였음직한 작은 부속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 난 쪽창이 좌측이 다소 긴 직사각형이라는 것까지 정확하게 포착했다. 남자는 네 곳에 표시된 빨간색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CCTV가 필요한 자리라고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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