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2020년 1월
(중략)
다가오는 위협
설 즈음에는 지인들과 집에 모여 파티도 하고, 고양이 치쿠도 만났다. 별문제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 괴질 소식이 간간이 뉴스에 나왔지만 우리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일로 느껴졌다(물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연구자들이 예측하던 일이 일어나는구나’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가 전 지구적으로 계속 문제가 되겠구나’ 하는 인상을 받을 정도의 정보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1월 22일, 우한과 그 주변이 봉쇄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지역의 봉쇄는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바이러스의 유행 정도가 심각할 때에나 겨우 들어본 소식이었다.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 플루나 2015년 메르스 유행 때에도 국경 봉쇄나 이동 금지에 준하는 조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중국 공산당 정부의 감염병 예방을 위한 선제적 조치인지, 상황이 실제로 심각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전 세계 모든 뉴스가 중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와 통제 조치, 현지에 있는 자국민들의 상황 보고를 반복해 읊기만 했다. 세계 보건 기구에서도, 미국 질병 통제 센터에서도 유의미한 보고나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 자제를 권고했을 뿐이다. 미국 대통령은 별일 아니고 중국인이 몇 명 감염된 정도이며 중국 정부는 할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봤던 현장과 제일 가까운 한국어 보도는 봉쇄 시작 당시 우연히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머물고 있던 이대목동병원 응급 의학과 남궁인 교수의 원격 인터뷰와 봉쇄 명령을 무시하고 우한을 탈출하여 기사를 낸 〈조선일보〉 박수찬 특파원의 탈출기,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이 보도를 접하고 불안이 엄습하면서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 Z》의 첫 장이 떠올랐다. 페이크 르포르타주 형식을 취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속에서 중국 정부는 ‘질병’ 확산 초기에 ‘질병’의 존재 자체를 인민과 전세계로부터 숨겼다. 이 때문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대비할 때를 놓쳐 ‘질병’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만다. 뉴스를 하나둘 접하며 “이게 설마 ‘그 질병’은 아니겠지”라고 말했다.
기묘하게도 우한 봉쇄 사태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인 1월 22일, 넷플릭스에 〈팬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다. 평소 온갖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전염병과 종료 다큐멘터리를 워낙 좋아한다. 출시 예고 때부터 관심 있는 항목으로 체크해 두었더니 출시 직후 바로 알림이 와서 이틀 내리 쉬지 않고 전편을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20세기 초 인플루엔자 범유행을 연구하는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뉴욕시의 유행성 질병 대비 체계, 범유전자형 독감 백신 개발, 안티 백신 운동, 미국의 의료 소외 지역, 인도의 인구 밀집 지역과 의료 인프라 부족, 중동과 중국의 인수공통감염병 연구, 서아프리카 에볼라바이러스 유행 지역의 어려움 등을 돌아가며 조망하는데, 여기에서 전문가들이 우려하고 지적한 부분들이 현실로 벌어지는 중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여섯 편에 걸쳐 질병 퇴치를 위해 싸우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의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범유행 전염병은 아직 오지 않았을 뿐, 언제나 올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전염병 병원체의 종류, 전파 양상, 증상, 시대, 지역과 국가, 문화와 관습 등 다양한 요인들이 전염병 유행 범위와 유행 이후의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지만, 예로부터 전염병 유행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사람들은 전염병을 두려워하고, 이때다 싶어 소수자를 차별하고, 기회를 틈타 돈을 모으려 하고, 고의로 병을 옮겨 남을 해치기도 하고, 일면식 없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심지어 언제든 부활 가능한 온라인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이 반복된 바로 그런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 또다시 일어나고 있다.
‘우한 폐렴’에 대한 뜬소문이 돌기 시작한 후, 후진국형 질병이 급증하고 있다는 한국의 한 인터넷 신문 기사를 보았다. ‘후진국형’ 질병이라니? 어처구니없는 표현이었다. 아무 데나 침을 뱉고 술자리에서는 으레 술잔을 돌리며, 손을 씻지 않는 건 예사에 심지어 샤워와 빨래도 종종 빼먹고 다니는 몇몇 한국 사람을 아는 입장에서 유행병이 돌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참 우습다. 한국은 OECD 선진국인데 왜 ‘후진국형’ 질병인 결핵, 간염, 볼거리 등이 유행하느냐며 자신들의 행동을 잊은 채 저소득·저개발 국가들에 대한 혐오부터 내뱉는다.
나중에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몇몇 한국 언론들이 ‘우한 폐렴’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인 입국을 거부해야 한다는, 혐오를 조장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언론이 원하는 대로 반응해주었다.
미국에서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되자 미국에서도 동양인을 타깃으로 정확히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미국에서의 나와 P의 위치는 한국에서와 다를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누구든 언제든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지간히 손 씻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에서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손 안 씻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곧 엉망진창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보다 손을 안 씻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 뉴욕은 더 심각할 것이 당연했다. 감염 예방을 위해 30초 정도 손을 씻으면 된다고 들었지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비누와 솔을 이용해서 3분 이상 손을 씻는 의사들을 생각하면 30초는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외출 후에 비누칠을 1분씩 해가며 공들여 손을 씻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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