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중략)
나는 과학 방송 진행자와 기자로 10년 넘게 활동하면서 전 세계 정상의 과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인터뷰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흥미로운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폭넓은 과학 지식을 얻고 사람들과 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얻은 이런 전문지식들은 퍼즐 조각과도 같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려면 이것들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인류는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위태로운 길, 지구 생명 절멸의 위협에 접어들었다. 우리의 현실 인식이 과학적 진실과 어긋남으로써 비롯된 위협이다. 이른바 ‘상식적’ 사고는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 눈을 가려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큰 맹점 열 가지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1부에서는 우리가 개인으로서 타고나는 맹점들을 소개하고, 과학과 기술이 어떻게 우리의 생물학적 한계너머를 보도록 하는지 살펴본다.
2부에서는 집단적 맹점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하나의 사회로서 어떻게 고집스러운 맹목에 갇혀 있는지 알아 본다. 여기서는 우리의 생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식량, 에너지, 쓰레기에 집중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감추어진, 우리 삶을 지탱하는 시스템을 과학이 어떻게 급속하게 바꿔 왔는지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세대적 맹점들을 살펴본다. 자연스럽고 불가피해 보이는 세계관들 중에는 사실 이전 세대에서 전승된 것들이 많다. 물고기는 자신이 헤엄치는 곳이 물속이라는 걸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거대한 차원 속을 우리가 어떻게 헤엄치고 있는지 여기서 살펴본다.
칼 세이건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인류에겐 마음이 깨어 있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민이 필요하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나는 그와 같은 필요에 응답하고자 작은 노력을 보태 이 책을 썼다. 그럼 시작하자.
1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1장 열린 유리병
망원경이 끝나는 곳에서 현미경이 시작된다. 더 거대한 시야를 제공하는 건 어느 쪽인가?
― 빅토르 위고
돈디디어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실종은 서커스 공연의 일부가 아니었다. 1913년 8월 16일자 『해밀턴 데일리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서커스 개막일을 이틀 앞두고 사라진 공연자를 찾아내려고 탐정과 탐지견이 급파되어 수색을 벌였다. 다행히 공연은 취소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에 단원 한 명이 천막 안에 숨어 있던 곡예사를 찾아낸 것이다. 비록 그 소동이 뉴스를 장식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불가사의한 그의 귀환이 아니라 그의 가치였다. 그 서커스 스타의 몸값은 500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만 2,000달러가 넘었다. 어떻게 봐도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왜냐하면 돈디디어는 벼룩이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환락이 있기 한 세기 전, 지상 최고의 쇼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것은 벼룩 서커스였다. 이 자그마한 녀석은 전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켜서 뉴욕, 파리, 런던 같은 도시로 그들의 공연을 보려고 멀리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발레리나 벼룩, 검술사 벼룩, 대포로 쏘아지는 벼룩, 괴력자 벼룩, 줄타기 벼룩, 탱고 댄서 벼룩, 공중그네 타기 벼룩이 있었다. 축소된 크기에서 벌어지는 대담한 묘기에 매료된 청중들은 가장 밉살스러운 생명체에 갈채를 보냈다. ‘풀렉스 이리탄스Pulex irritans’, 즉 피를 빨아먹고 병을 옮기는 사람벼룩은 서커스에서 대대적인 주목을 받는 스타가 되었다.
벼룩 서커스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잘 지켜진 비밀에 있었다. 다들 벼룩을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궁금해했다. 벼룩은 숙련된 도망자였으므로 무대에서 얼마든지 쉽게 뛰어내려 도망칠 수 있었다. 벼룩을 훈련시키는 사람들공식적인 직함은 ‘교수’이 털어놓은 묘책은 이것이다. 벼룩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둬서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벼룩을 작은 유리병 속에 넣고 조심스럽게 밀봉했다. 날개가 없는 벼룩은 숙주의 몸에 뛰어올라 피를 빨아먹도록 진화한 스프링이 장착된 다리를 가졌다. 덕분에 자기 키 높이의 100배 이상 점프할 수 있고, 3만 번 이상 풀쩍풀쩍 뛰어다녀도 끄떡없다. 그러나 병 안에서 이 능력은 벼룩에게 불리하게 작동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칠 때마다 몸이 뚜껑에 세게 부딪혀 충격받는 일을 반복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벼룩은 금세 교훈을 터득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뚜껑에 닿지 않을 정도로 낮게 뛰어올랐다. 이 무렵이면 이제 뚜껑을 열어 놓아도 벼룩은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고 교수들은 말한다. 한 차례만 제대로 뛰어오르면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그들 마음에 설치된 덫이 발목을 잡았다.
그건 훌륭한 이야기였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좋은 이야기. 다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벼룩 훈련은 인간 사회에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벼룩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수’들도 잘 알았듯이 벼룩을 훈련시킬 수는 없다. 여러분이 유리병의 뚜껑을 열면, 벼룩은 당연히 도망친다.
그러나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목격자들은 벼룩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춤추고 곡예를 부리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벼룩은 대체 어떻게 그런 믿기지 않는 묘기를 부리는 걸까? 이 유쾌한 구경거리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문이었다.
분홍색 발레 스커트를 입고 작은 파라솔을 든 벼룩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벼룩이 몸에 두른 황금색 철삿줄이 목줄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축구하는 벼룩’은 시트로넬라에 담근 자그마한 솜뭉치를 가지고 노는데, 그 냄새가 혐오스러워서 몸에 닿으면 멀리 찬다. ‘저글링하는 벼룩’은 접착제로 등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다리를 놀려 보풀을 뭉친 공을 차도록 한다. 벼룩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경우, 뮤직박스 좌석에 줄로 고정시키고 앞다리에 작은 악기 모형을 붙이고는 박자에 맞춰 머리를 툭 치거나, 때로는 더 가혹하게 아래에 불을 지펴 뜨거움에 다리를 놀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음악에 맞춰 몸을 까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바이올린에 신호를 주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사람에게 벼룩 한 마리의 목숨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백 마리도, 천 마리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벼룩이 몰살되는 아마겟돈이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묘하게도 사람들이 오늘날 유튜브에서 ‘괴력자’ 벼룩이 작은 차를 끄는 것을 보거나 ‘곡예사’ 벼룩이 줄 위를 걷는 모습을 보면, 그러니까 우리가 교감할 수 있는 규모의 화면으로 보면 반응이 달라진다. ‘벼룩을 아프게 하고 있어!’ ‘철삿줄이 그들 목을 조르고 있어!’ ‘이건 동물 학대야!’ 물론 그들도 집에서 벼룩을 본다면 당장 으스러뜨리고 내친 김에 소독까지 할 가능성이 높다.
몸집이 큰 인간은 자그마한 생명체를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벼룩 전문가이자 곤충학자인 팀 코커릴은 이렇게 말했다. “가끔 런던 같은 도시에서 자그마한 알갱이가 방안에 날아다니거나 식탁에, 혹은 술집에서 맥주잔에 내려앉는 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생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먼지나 검댕처럼 여겨 그냥 손으로 집어서 휙 하고 날려 버린다. 하지만 실은 다양한 동물들이 들어 있다. 잠깐 시간을 내서 알갱이 안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 말은 사실이다. 실제로 완전히 새로운 종들이 이런 식으로 발견되었다.
***
로버트 훅은 지성계의 거인이었지만 척추 측만증과 척추 결핵을 앓았고 등이 구부러진 장애가 있었다.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천문학, 생물학, 물리학, 고생물학, 심지어 건축학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여를 했다. 일찌감치 그는 빛이 파동이라는 이론을 내놓았고, 공기의 존재를 증명했고, 인간 시력의 한계를 규정했고, 세포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으며, 화석이 한때 살아 있던 생명체의 흔적이라고 추론했고, 생물 종은 멸종해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벼룩을 확대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 앨런 채프먼이 “코뿔소와 같은 해부적 정확성을 발휘하여 그렸다”고 평가한 벼룩의 확대 그림은 훅의 1665년 베스트셀러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 가운데 삽지로 삽입되었다. 그는 성격이 몹시 까다로워서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책 덕분에 대중적으로는 무척 인기가 많았다. 그는 확대된 세계의 경이를 보여 주었다. 벌침, 파리 다리, 달팽이 이빨자그마치 2만 개가 넘는다, 치즈에 붙은 진드기의 세세한 묘사는 오늘날 사람들마저 당혹스럽게 만드니, 이런 “자그마한 생물”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에게 훅의 책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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