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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이랑 까치랑
장난치는 산울림
― 백석 「청시」 「추일산조」, 윤동주 「산울림」
필사와 평가의 예, 청시
「청시」는 시집 『사슴』1936에 수록된 작품이다. 한문 제목 ‘청시淸市’는 아직 익지 않은 푸른 감이다. 떫은 맛 나는 감이다. 4부로 이루어진 시집 『사슴』의 각 부에는 제목이 붙어 있다. 1부는 ‘얼럭소세끼의 영각’, 2부는 ‘돌덜구의 물’, 3부는 ‘노루’, 4부는 ‘국수당넘어’이다. 「청시」는 3부 ‘노루’에 실려 있다.
별 많은 밤
하늬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
― 백석, 「청시」 전문
3행의 짧은 소품이다. 감이 익기 전 청시 상태에서 바람 때문에 떨어지는 순간을 쓴 소품이다. 홍시로 익어야 하는데 떫은 상태로 떨어진 상황이다. 딱딱한 청시가 툭 떨어지자, 하늘에 별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밤에 개가 짖는다. 시인은 별과 개를 연결시키려 한다. “별 많은 밤”이라는 시각적인 이미지, “개가 즞는다짖는다”라는 청각적인 이미지는 어떻게 연결되었을까.
“하누바람하뉘바람이 불어서/푸른감이 떨어진다”라는 구절이 별과 개 사이에 있다. 서풍인 하늬바람 부는 가을날 푸른감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깜짝 놀라며 짖는 밤이다. 윤동주는 이 시의 미세한 연결고리를 예민하게 잡아낸다.
“개가 즞는다”는 끝 문장에 윤동주는 “결구에서 작품을 살리었다”라고 붉은 색연필로 썼다. 만약 “개가 짖는다”라는 구절이 없다면, 이 시는 새롭게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 푸른 감이 떨어지자, 소리에 민감한 개가 짖는다. 작은 누리와 작은 누리가 연달아 반응한다. 원문을 보면 띄어쓰기에 상관없이 문장 네 개가 붙어 있다. 마치 작은 누리들의 연쇄현상이 시각적으로도 붙어 있는 듯하다. 백석이 직접 교정보았을 초판본 『사슴』에도 띄어쓰기 안 하고 붙여 썼다. 백석 시 「모닥불」을 설명할 때 쓰겠지만, 백석의 의도는 낭송할 때 이대로 끊어서 읽어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당연히 이 시를 읽을 때는 호흡 쉼표를 네 번 넣어 읽어야 한다.
별많은밤
하누바람이불어서
푸른감이떨어진다
개가즞는다.
‘별밤에→하누바람 불자→바람에 흔들린 푸른감이 떨어지고→감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놀라 짖는’ 연쇄현상이다. 백석 시에는 우주의 작은 누리가 움직이면 또 다른 작은 누리가 연쇄적으로 반응하는 정동情動 현상이 일어난다. 그냥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누리도 감정의 느낌[情]을 가지며 움직이는[動] 것이다.
백석 시 「청시」에는 우주적 상상력이 충만하다. 윤동주는 백석 시에 나타나는 우주적 움직임, 우주적 화합, 우주적 정동에 공감하지 않았나 싶다. 「청시」를 필사하고 난 4년 뒤인 1941년 11월 5일,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을 쓴다. 이 시에는 별, 하늘, 달 등 우주적인 상징과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한다. 윤동주가 좋아하는 백석 시에도 천상天上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별과 우주와 인간이 하나 된 우주적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백석 「추일산조」와 동주 「산울림」
시는 짧으면 짧을수록 독자에게 더 깊게 생각하게 한다. 동주가 백석 시에 여러 번 밑줄 치고 자기 식으로 새롭게 시를 창작한 예가 「산울림」이다. 우선 백석의 「추일산조」를 읽어보자.
아침볕에 섶구슬이 한가로이 익는 골짝에서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
산마루를 탄 사람들은 샛꾼들인가
파-란 하늘에 떨어질 것같이
웃음소리가 더러 산밑까지 들린다
순례중이 산을 올라간다
어젯밤은 이 산절에 재가 들었다
무리돌이 굴러나리는 건 중의 발굼치에선가
― 백석, 「추일산조秋日山朝」
‘섶구슬’은 구슬댕댕이나무의 작은 열매를 말한다. 섶구슬 열매가 익는 골짝곬작에서 꿩의 울음이 메아리치는 것을 “꿩은 울어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문장에 윤동주는 붉은 색연필로 “좋은 구절句節”이라고 표기했다. 동주는 왜 이 문장에 유난히 두껍게 붉은 칠을 했을까. 아주 재밌는 조응이 아닌가. 꿩이 울자 그 울음소리를 듣고 산골짝이 호응하듯 맞받아 울린다. 그 산울림을 시인은 “장난을 한다”고 표현했다. 꿩이 산울림과 장난하는 상상, 독특한 상상 아닌가.
“샛꾼”은 새꾼으로, 나무꾼을 말한다. 산에서 나무꾼들 웃음소리가 난다. 명랑하고 시끌벅적한 새꾼의 모습과 대비하여, 순례중이 조용히 산에 오르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산절에 재가 들었다”고 하는데, ‘재齋’는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에게 드리는 공양을 말한다. “무리돌”은 한꺼번에 산중턱에서 굴러내리는 자갈을 뜻한다. 산에 오르는 중의 발꿈치에 밀려 무리돌이 굴러내리는 것을 “중의 발굼치에선가”라며 산뜻한 여운으로 마무리한다.
눈에 뜨이는 것은 동주가 두껍게 붉은 색으로 칠한 부분이다. “산울림과 장난을 한다”는 바로 그 밑줄 친 문장에서 ‘산울림’이라는 단어를 떼어 동주는 시 한 편을 썼다.
1938년 윤동주는 동시 네 편 「산울림」「애기의 새벽」 「햇빛·바람」 「해바라기 얼굴」을 쓴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혼자 들었다,
산울림,
― 윤동주, 「산울림」1938.5 전문. 《소년》 1939년 3월호에 발표
「산울림」은 백석 시집 『사슴』을 필사하고 1년 뒤에 쓴 작품인데, 이 시에서 백석 시 「청시」와 비슷한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까치가 울어→산울림이 일어났는데→아무도 듣지 못한다.’ 반대로 ‘까치가 산울림을 들었는데→까치만 듣고 아무도 듣지 못한다’. 까치와 산울림은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듣고 반응한다는 독특한 상상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멈칫한다. 까치와 산울림이 ‘장난’하는 놀이는 꿩이 산울림과 ‘장난’하는 백석 「추일산조」에 나오는 구조와 같지 않은가. 시의 착상이 유사하고, 새 이름이 나오고 ‘산울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동일성을 볼 때, 동주의 「산울림」은 백석의 「추일산조」를 읽은 뒤 영향 받은 작품이 아닐까.
「산울림」은 까치의 소리만 울리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소품이다. 세상과 “저 혼자” 만나는 단독자의 모습, 그 연쇄현상은 이미 윤동주 시 「나무」에서도 볼 수 있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 윤동주 「나무」1937 전문
이 시에서도 나무가 춤을 추자 바람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주체가 윤동주 시에는 확실히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산울림」에서는 그 주체가 까치이고, 「나무」에서는 그 주체가 나무다.
「산울림」은 『소년』 1939년 3월호에 윤동주尹東柱라는 필명으로 발표된다. 윤동주가 쓴 동시 중·후반기에 속하는 작품으로 이후 동시를 쓰는 동주童舟가 아닌, 본명 ‘시인 윤동주尹東柱’로 작품을 발표한다.
더 이상 동시를 쓸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부정적 세계관이 증폭되었기 때문일까. 성인成人으로서 ‘詩人 尹東柱’는 동시가 아닌 시에서도 백석 시와 교류한다.
백석과 윤동주, 두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기 시작했을까. 윤동주는 백석에게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극복하며 새롭게 창작했을까. 논문 몇 편으로 담을 수 없어 책 한 권으로 담아본다. 두 시인의 고향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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