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오나?
예.
2019년 9월 5일 목요일 오후 여의도성모병원 호스피스 병실에서 창가의 하늘을 보며 하신 말이다. 당시 하늘은 구름으로 잔뜩 찌푸려 있었다. 엄마는 병원에 계시면서도 늘 병실 바깥의 세계에 관심을 보이셨다.
엄마는 다음날 24일 생을 마감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이면 왠지 엄마의 이 말이 귓전에 맴돈다.
2
저기
꽃이네.
예에.
여의도 성모병원에 계실 때 엄마 맞은편 환자의 병상 옆 화병에 꽂힌 꽃을 얼굴로 가리키며 하신 말이다. 이 말을 하시고는 다시 말이 없으셨다.
엄마는 유달리 꽃을 좋아하셨다. 엄마는 수유리 북한산 아래의 집에서 45년을 사셨는데 집에는 꽃이 핀 화분이 늘 있었다. 나는 20여년 동안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엄마집에 갔었는데, 종종 철따라 길가에 핀 꽃을 한송이 꺾어서 엄마에게 갖다드리곤 했다. 엄마는 그때마다 환하게 웃으시며 병에다 그 꽃을 꽂아 식탁에 두셨다. 한번은 무더운 여름날 나팔꽃을 한송이 꺾어 갔는데 “나팔꽃이네” 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셨다.
저 꽃을 보고 있으니 문득 엄마와 함께한 많은 날들이 떠오르고, 엄마가 이리 아프신데도 꽃을 보고 좋아하시는 모습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맞은편 병상의 환자는 얼마 후 세상을 하직했다.
3
늙으나 젊으나 전다지
물건 덩어리다.
예?
북부병원의 호스피스 병실에 계실 때 하신 말이다.
엄마는 2018년 12월 하순부터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 국립중앙의료원 호스피스 병동, 여의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서울특별시 동부병원 호스피스 병동, 서울특별시 북부병원 호스피스 병동, 여의도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은평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여의도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차례로 계셨다. 서울성모병원 완화의료 병동은 규정상 열흘 정도밖에 있을 수 없었고, 나머지 병원은 병원마다 규정이 달랐는데 한달 아니면 두달간 있을 수 있었다. 퇴원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같은 병원에 다시 입원할 수 있었다.
북부병원에 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당시 엄마 상태가 몹시 안 좋으셨다. 직전 동부병원에 있을 때는 그럭저럭 밥을 드셨는데, 6월 7일 북부병원으로 전원한 뒤부터 상태가 나빠져 죽도 드시지 못해 도토리묵으로 한달 반을 연명하셨다. 엄마는 4인 병실에 계셨는데, 엄마가 아흔으로 나이가 제일 많고 나머지는 40대, 50대, 80대 여성이었다. 엄마의 병상 대각선 방향의 병상에 계신 80대 여성은 인지장애와 욕창이 아주 심해 자나 깨나 고통스레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엄마의 병상 맞은편에는 40대 여성이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다. 이 두분은 물도 한모금 마시지 못했으며 링거만 맞고 있었는데, 눈이 풀려 있었고 입은 벌어져 있었다. 엄마는 깨어 있을 때면 늘 이 두분을 주시하셨다.
위의 말은 이런 상황에서 발화(發話)된 것이다. ‘전다지’는 ‘모두’의 사투리다. ‘물건 덩어리’는 ‘골칫덩어리’라는 뜻이다. 엄마 자신을 포함해 젊은 사람이건 늙은 사람이건 모두가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주사만 맞고 있는 것을 슬퍼할 말이 아닐까 한다.
4
셋째!
선생님!
북부병원에 계실 때 완화의료도우미가 엄마에게 나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누구예요?”라고 묻자 엄마가 즉각 답한 말이다. ‘셋째’는 ‘셋째 아들’이라는 뜻이고, ‘선생님’은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하신 말이다.
엄마는 인지장애가 있었지만 숨을 거두실 때까지 한순간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적이 없었으며, 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사랑은 의식을 넘어 존재한다는 것, 엄마는 이런 높디높은 진리를 선물로 남겨주고 떠나셨다.
5
머리가 더부룩하네.
다음에 올 때 깎고 온나.
보기 흉하다.
예,
그라겠십니더.
북부병원에 계실 때 하신 말이다. 당시 여름방학이라 학교도 안 가고 해서 이발을 안 해 머리가 좀 길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병상에 누워 계셨지만 나의 이모저모를 늘 살피셨다. 남들 눈에 혹 내가 흉하게 보일까봐 이런 말을 하신 것이다. 이튿날 이발을 하고 가자 엄마는 좋아하셨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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