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으로 들었소
“공원에 예쁜 아기 고양이가 있어! 네가 보면 정말 좋아할 거야.”
모든 것은 일산에서 서울까지 흘러 들어온 소문으로부터 시작됐다. 때는 2016년 초여름, 본가의 아파트 단지 공원에 사람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고양이’가 나타났다는 어머니의 제보였다. 수풀 속에 숨기는 하는데 도망가진 않아서 너무 귀여운 나머지 한자리에서만 30분을 지켜봤다고 했다. “사진은요?” “아! 놀아주다가 못 찍었어.” 안타깝게도 그림이 없는 제보였다.
그땐 사실 시큰둥했다. 예쁜 고양이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도 많은 데다, 나는 고양이보단 강아지파(당시 7만 명의 인스타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 웰시코기 ‘백호’의 열혈 팬이었다. 현재 백호의 인스타 팔로워는 대략 20만 명이다!)였기 때문이다. 공사가 다망하여 한동안 본가에 가지 못해, 소문의 길냥이 ‘나무’를 직접 만난 건 두어 달쯤 지나서였다. 나는 나중에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처음 만났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름의 끝자락이었고, 나무가 태어난 지 7개월쯤으로 추정되던 때다. 나무는 소문대로 살가웠다. 첫 만남부터 내 종아리에 몸을 비비며 주위를 맴돌았고, 보드라운 꼬리가 찰싹찰싹 내 다리를 때리는 느낌이 경쾌했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길냥이라니, 얼굴을 볼 만큼 본 친구네 고양이도 내가 다가가면 피하던데!
터키 이스탄불의 길고양이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케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고양이가 발밑에서 당신을 올려다보면 야―옹 한다면, 그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짓는 거랍니다.”
이건 정말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 역시 그렇게 나무와 사랑에 빠졌으니까.
내가 나무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이내 알게 된 사실, 나무는 공원의 아이돌이자 ‘초통령’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길냥이 급식소캣맘들이 공원에 마련해둔 배식 장소를 지날 때마다 나무를 찾아 기웃거렸다. 초등학생들은 등하굣길에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나무야!”를 외쳤다. 나무는 모두의 관심을 반기지 않는 듯, 거부하지 않았다. 나에게 보여준 그 달콤함은 슈퍼스타의 아주 여유로운 팬 서비스였던 것이다.
뒤늦게 나무의 팬이 된 나는 모르는 게 많았다. “얘 이름이 왜 나무야?” 어느 날 초딩들에게 묻자 깜찍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무를 좋아해서요!” 아아, 초딩도 귀엽고 나무도 귀엽다. 더 일찍 보러 와야 했는데….
아직 만 1세도 안 됐지만 나무의 덩치는 성묘에 가까웠다. 아깽이아기 고양이 시절의 나무를 아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래서 어머니 말씀은 재깍재깍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라도 만난 게 어딘가. 언제든 훌쩍 사라질 수 있는 나무를 한 번이라도 더보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본가를 드나들었다.
더 어린 나무를 보지 못해 아쉬워했던 내가, 늙어가는 나무를 원 없이 볼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은 훨씬 더 나중의 일이다.
길냥이의 하루하루
나무는 바쁜 고양이였다. ‘어쩌다 집냥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하루 종일 캣타워를 오르내리며 창밖 너머를 구경하는 게 고작이지만, 예전에 살던 공원은 나무가 아무리 뛰어도 끝이 없을 만큼 광활했고 볼거리도 많았다. 베이스캠프와도 같았던 길냥이 급식소에서 식사를 마치고 몇 시간씩 ‘마실’을 나갈 때면,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자유롭고 화려하지만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나무의 공원 생활. 그 일상을 내가 파악한 범위 내에서 관찰일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2016년 8월 X일
오늘날 급식소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공원에 나온다고 매번 나무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공원은 워낙 넓고 나무도 나무만의 묘생이 있으니, 내가 찾아가는 시간에 맞춰 나무가 그 자리에 있으란 법은 없다.
“나무야.”
아쉬운 마음에 허공에 이름을 부르자 수풀 속에서 나무가 나타났다.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지나쳐 어슬렁거리며 급식소로 향한다. 배가 고파서 왔군. 원목으로 된 급식소 안에는 건식 사료가 소복이 쌓여 있는데, 이 구역의 길냥이 여럿이 함께 먹는 양이다.
이 동네에서 ‘도둑고양이’는 다 옛말이다. 길냥이는 인간의 음식을 탐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아무튼 식사를 마친 나무는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2016년 9월 X일
가을비가 내렸다. 급식소에서 비를 맞으며 밥을 먹는 나무를 발견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크기가 너무 커서 평소엔 잘 안 쓰던 것인데 급식소를 덮기에 알맞았다. 좁은 공간을 좋아하는 나무가 우산 밑으로 쏙 들어가 앉아 비를 피한다. 그래, 그렇게 쓰는 거란다.
2016년 9월 X일
나무는 오후에 가장 바쁘다. 초딩들이 학교에서 몰려나오는 때라 귀찮아질 수도 있는 시간인데, 나무는 굳이 자전거길 한가운데나 풀밭에 앉아 있곤 한다. 분명 자신의 뜨거운 인기를 즐기기 때문일 거다. 아이들은 나무를 발견하면 빙 둘러서서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다. 더러는 주운 나뭇가지 등을 휘두르며 관심을 끌기 위해 애쓴다.
한 명이 가까이 다가가 쓰다듬으면 너도나도 우르르 달려드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어른은 초조하다. ‘나무 오빠 피곤하시니까 줄 서서 한 명씩 오실게요!’ 마음속으로만 외쳐본다. 팬 미팅과도 같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나무는 슬그머니 일어나 잘 곳을 찾는다. 대개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수풀 속이나 폭신하게 쌓인 낙엽 위다.
“나무 자나 봐. 이제 가자!”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나무의 낮잠을 위해 하나둘 자리를 뜬다. 생명을 존중하는 법을 이렇게 배워가나 보다.
2016년 10월 X일
나무의 사회생활을 목격했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진 않았다. 나무가 다른 길냥이를 졸졸졸 따라다니는데, 아무리 봐도 같이 노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나무보다 덩치가 크고 연배도 있어 보이는 그 길냥이는 나무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무가 다른 고양이와 어울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아들내미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멀찍이서 발만 동동 구르다 집으로 돌아왔다.
2016년 10월 X일
나무의 또 다른 보호자를 만났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공원 길냥이들을 챙겨주는 손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마주친 건 처음이다. 캣맘들은 능숙하게 급식소에 사료를 채우고, 길냥이들에게 참치 캔 간식을 나눠줬다. ‘가끔 마실 물을 갈아주고 비 올 때 우산을 놓아줬던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더니 바로 알아본다.
“이 녀석 정말 애교가 많아요, 그죠?”
나무의 귀여움을 찬양하며 시작한 대화는 이내 걱정으로 이어졌는데, 사람을 너무 따라서 위험하다고 했다. 하긴, 나무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모두 캣맘이나 아이들처럼 무해하다는 보장은 없다. 동네 길냥이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것도 사람을 반기는 성격 때문인 듯했다.
길에 사는 고양이는 야생 동물에 가깝다. 그래서 보통은 사람을 보면 멀리 달아난다. 밥을 주는 캣맘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는 고양이가 많은데, 사실 길냥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 편이 옳다. 이렇듯 사람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선배 길냥이’들에게 나무는 별종이고 기피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에게 이토록 예쁨을 받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다’며 안심했던 내 생각이 와장창 깨졌다. 우리의 걱정을 나는지 모르는지, 간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나무는 천하태평하게 ‘발라당개를 보이고 드러눕는 모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나도 캣맘들의 걱정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본문 중 일부)
#문학나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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