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破墓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138쪽)
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이순일은 여러차례 그렇게 말했고 이제 그때가 되었다. 11월 둘째 주였다. 한세진은 아침 여섯시에 차를 몰아 집을 나섰고 별다른 막힘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려 이순일이 사는 집에 도착했다. 셔터를 내린 차고 앞에 차를 바짝 붙인 뒤 엔진을 끄자 바로 시트가 식었다. 추운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면 기온이 조금 오르겠지만 그날의 목적지는 군사분계선 근처였고 이맘때 그곳의 한낮은 여기 밤보다 추웠다. 매년 그랬다.
한세진은 들고나는 차들의 무게로 들뜨고 부서진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보며 머리를 다시 묶은 뒤 4층으로 올라갔다. 이순일이 짐을 다 꾸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녹두전, 고추전, 고기볶음을 담은 밀폐용기, 사과, 배, 술 한병을 담은 종이 가방과 그보다 작은 배낭 한개. 이순일은 이번에 그릇을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스티로폼이나 은박 말고, 진짜 접시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한세진이 배낭을 집어 들자 안에 든 접시들이 묵직하게 늘어지며 왈그락 소리를 냈다. 아마 깨질 거라고, 깨져도 괜찮은 그릇들이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왜 깨지냐고, 조심하면 깨지지 않는다며 도로 가져올 그릇들이라고 답했다. 한세진은 더 말하지 않고 짐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한세진은 짐을 전부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에 담요 한장을 펼친 뒤 차에 시동을 걸어 열선을 작동시켰다. 이순일이 4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다 내려와 현관에 나타났을 때 한세진은 자동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차장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엄지보다 두껍고 뭉툭한 나사 두개가 녹슬고 짓눌린 채 바닥에 솟아 있었다. 주차방지 장치의 흔적이었다. 그 집 주차장에 멋대로 차를 대고 사라지곤 하는 이웃들을 막기 위해 한세진의 형부가 설치한 것이었는데 세입자들과 본인의 차가 드나들기에도 불편하고 번거로웠는지 어느 날엔가 제거되었고 바닥에 깊이 박힌 나사 두개만 남았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어느 우연한 각도로 차량이 그 위를 지나갈 때 타이어가 뚫리기엔 충분해 보였다. 지난번 이 집을 방문했을 때 한세진은 그 나사들이 좀 위험할 수 있겠다고 이순일에게 말했고 이순일은 그 말을 네 형부에게 전해주마고 대꾸했다. 이게 그대로 있네, 한세진이 일어서며 말하자 이순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했는데 끝내 제거하지 않더라는 뜻인지 눈치를 살피느라 아직 말도 꺼내지 못했다는 뜻인지. 한세진은 그런 것은 묻지 않고 이순일이 뒷좌석에 앉는 것을 도왔다. 오른쪽 보행을 돕는 두랄루민 지팡이를 받아 트렁크에 넣고 콘솔 박스에 불편한 다리를 얹을 수 있도록 신발을 벗긴 뒤 부은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순일은 짧은 챙이 달린 털실 모자를 썼고 솜을 넣고 누빈 바지에 주홍색과 갈색이 어지럽게 섞인 카디건을 입었으며 폭이 좁은 편물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입고 춥지 않겠느냐고 한세진이 묻자 이순일은 안에 여러겹 입었다며 손으로 배를 두드려 보였다. 등산화도 챙겼다. 한세진의 언니인 한영진이 단 한번 사용하고 수년째 내버려둔 등산화가 어디 박스 속에 아주 말끔하게 있더라며 본인에게는 조금 크지만, 산에 오르기 전에 양말을 한겹 더 신으면 딱 맞을 거라고 이순일은 말했다. 그들은 출발했다.
북동 방향으로 올라갔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원활하게 나아간다면 목적지까지 두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였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거기 어디쯤에 할아버지의 묘가 있었다. 한세진도 이순일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는 이순일에게 할아버지였고 한세진에게는 외증조부였다. 그의 묫자리는 최전방 부대가 자리 잡은 산속이었는데 그 산엔 그의 묘뿐 아니라 지경리 이민들의 묘가 얼마간 흩어져 있었다. 거기로 올라가려면 부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 산에 제사 드릴 묘를 둔 지경리 사람들은 매년 추석 즈음, 음식을 꾸린 보따리와 예초기를 짊어지고 부대 앞에 모였다가 초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산을 올라갔다. 장총을 지닌 군인이 각 가정당 한명이나 두명씩 동행했다. 이순일은 1980년대 중반부터 매년 그 산으로 성묘를 다녔고 한세진이 면허를 따고 자기 명의의 차를 가진 뒤로는 한세진과 동행했다. 추석이 다가오면 이순일은 어렸을 때 이웃사촌으로 지낸 지경리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마을에서 입산 날짜를 어떻게 논의하고 있는지, 언제로 잡았는지를 물은 뒤 한세진에게 전화를 걸어 그해 성묘 일정을 알렸다.
곶감 먹자.
이순일이 꼭지를 떼어내고 반으로 가른 곶감을 운전석 쪽으로 내밀었다. 한세진은 전방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곶감을 받아먹었다. 차는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뜨고 있었고, 도로 오른편으로 산안개가 그 아래 펼쳐진 논을 향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 흐름이 원활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세진은 말했다. 이순일은 인부들이 벌써 산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는지를 걱정하며 더 일찍 출발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느냐고 걱정했다. 삽을 대기 전에 마지막 상을 올려야 하는데. 이순일은 지경리보다 더 위쪽인 갈골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부모와 사별한 뒤 지경리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본래도 많지 않았던 일가친척은 대부분 한국전쟁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묻힌 곳도 간 곳도 모르게 사라졌고, 살아남은 혈육인 할아버지가 나이 다섯인 이순일을 거둬 밥을 먹이고 심부름도 시키고 하다가 손녀 나이 열다섯 때 먼 친척이 산다는 김포로 보냈다. 이순일은 거기서 시장 일을 돕다가 시장 상인의 중매로 만난 한중언과 결혼했다. 길이 멀고 교통도 편치 않아 결혼식에 노인이 못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가 낡은 솜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와 결혼식장에 앉아 있다가 국수를 먹고 갔다고, 이순일은 한세진에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1978년에 지경리에서 죽었다. 마을 남자 서넛이 새벽에 그의 관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 중턱쯤에 묻었다. 한세진은 그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얼굴을 알았다. 그의 사진을 넣은 액자가 가족사진들과 같이 벽에 걸려 있었다. 뻣뻣한 백발에 챙 없는 헝겊 모자를 눌러 쓰고 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란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얼굴과, 사진에 드러난 표정만 봐도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마며 눈썹이며 눈이며 코가 동글동글한 것이 이순일과 닮은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사진이 걸린 공간에서 그것을 멍하니 혹은 골똘히 올려다보며 살아서인지, 한세진에게 그는 여러번 만난 사람 같았다. 매년 그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는 정도의 심정으로 성묫길에 동행했다. 한세진이 같이 가기 전에는 이순일이 몇번이고 버스를 갈아타며 혼자 그 길을 다녔다. 한영진이나 한중언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 한중언의 장남이자 한씨 집안의 막내인 한만수는 너무 어리거나 길을 몰라서, 그 길에 동행한 적이 없었다.
한영진과 한중언은 거기 뭐가 있다고 매년 기를 쓰고 가느냐는 입장이었다. 해마다 사람 키만큼 자란 풀들을 낫으로 끊어내며 가야 하는 마른 도랑과 뱀이 늘어져 있곤 하는 덤불,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해 휘어진 나무와 이끼들, 볼품없이 이지러진 봉분과 멧돼지가 다녀간 흔적들, 묘를 둘러싼 밤나무, 소나무의 침묵을 그들은 몰랐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
할아버지. 내년엔 못 올지도 몰라요.
최근 서너해 동안 이순일은 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곤 했는데 올해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이순일은 일흔둘이었고 내년엔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을 예정이었다. 산에서 나고 자라 능숙하게 산비탈에 달라붙어 두릅이며 고사리를 캐곤 하던 이순일은 이제 평지에서도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했고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었다. 길도 없는 산을 오르내리는 일을 이제 감당하기가 어려워 올해가 마지막, 올해가 마지막, 하며 몇년을 버렸는데 더는 할 수 없다. 이순일이 마침내 그것을 인정한 게 올 초였다. 이순일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버려진 듯 산속에 남을 묘를 걱정하더니 파묘해 없애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자기가 죽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을 무덤이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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