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모두 슈호프다
오감을 깨우는 책읽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여전히 우리에게 독서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가장 안정적이고 풍부한 샘물이다. 어떤 사람은 책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기 때문이다. 책은 무엇보다 깊이와 너비에서 다른 채널들에 비해 월등하다. 학자나 작가가 몇 해를 혹은 심지어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물들이 그 한 권의 책 속에 농밀하게 녹아 있을 뿐 아니라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이 분명하다.
예전에는 책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가장 확고한 채널이었지만 이제는 다양하고 ‘빠른’ 채널들이 널려 있을 뿐 아니라 어렵게 글을 읽지 않아도 되는 영상 정보가 넘친다. 그러니 책을 멀리한다. 책 안 읽어도 된다. 다만 그런 정보나 지식들은 파편적이다. 큰 그림을 그리고 구상하며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인의 삶을 만들지 못한다. 주체적 삶이 어렵다. 노예로 살아도 사는 건 가능하다. 명령에 따라 노동하면 먹을 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책은 내가 삶의 주인이 되도록 하며 나와 세상 그리고 삶을 이어주는 창window이다. 무엇보다 책은 섬세한 사유, 다양한 감각, 깊은 감정의 세계를 확장해주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
왜 우리는 『어린왕자』틀 애정하는가?
한국인들 책 안 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갈수록 그런 성향은 심화될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읽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낡은古 ‘더미의 책典’이다. 그러면서 고전苦戰한다. 고전古典은 고전高展 즉 높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사람들의 인식과 감각을 깨운다. 살면서 더불어 갈 도반이다.
그런데 그토록 책을 꺼리고 특히 고전에는 손사래 치는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고전이 있으니, 아마 그 으뜸을 꼽으라면 바로 『어린왕자』 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워낙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유독’ 좋아하는 이유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삶에 대한 반작용인 듯싶다. 지금의 내 삶이 맑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따뜻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거나 심지어 반대의 상황일 때 저절로 그런 상태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이 생긴다. 그럴 때 『어린왕자』를 떠올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지금보다 어릴 때 읽었다. 그때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맑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따뜻했다. 책의 내용도 그렇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일상에서 잃고 살았던 그 감정들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는?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라는 회고적 감상에 빠질 뿐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비가역적인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 감상과 자기 위안에 그친다. 물론 작가가 ‘레옹 베르트에게’ 헌정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세 번째 이유, 즉 ‘그 어른이 지금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며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그 어른을 달래줄 필요가 있다’라고 했던 말에 비추면 ‘위로’의 목적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그는 ‘꼬마였을 때의 레옹 베르트에게’라고 헌사를 고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작품을 특별하게 애정하는 이유를 탓할 건 없다. 그러나 그 ‘꼬마’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어린 소년이 아니라 늘 그의 삶 안에 푸른 나무처럼 살아있는 ‘작은 아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칠레의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마지막 시집 『질문의 책』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누구나 ‘나였던 그 아이’는 있다. 그 아이였을 때 나는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순수하고 따뜻했으며 꿈을 지녔다. 그 아이를 잃고 산다. 가끔 옛 친구를 만나면 그 아이를 떠올린다. 심지어 그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아이로 사는 건 비현실적이거나 손해 보기 딱 좋다고 여길 뿐이다. 문제는 ‘나인 그 아이’가 있는가이다. 정작 ‘나인 그 아이’를 놓친다. 프랑스어 ‘petit’나 영어 ‘little’에는 ‘어리다, 작다’ 등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어린왕자’로 번역한다. ‘작은 왕자’는 없다.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의도한 건 ‘어린 왕자가 아니라 ‘작은’ 왕자의 뜻에 가깝다고 나는 판단한다. 삶은 ‘나였던 그 아이’가 ‘나인 그 아이’를 통해 ‘나일 그 아이’로 향해 가는 것이다. 누구나 생물학적으로는 나이 들면서 노쇠하지만 ‘그 아이를 품고 사는 한 존재론적으로는 언제나 푸른 나무로 살아갈 수 있다. 『어린왕자』를 ‘작은왕자’로 해석하며 그 아이를 품고 사는 한, 내게 ‘나인 그 아이’인 ‘작은왕자’는 어떤 모습일까?
모든 감각을 께우는 읽기는 결국 생각하고 느끼기다
『어린왕자』에는 여러 등장인물(?) 들이 줄 잇는다. 각각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는 이미 섭렵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읽기는 ‘지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첫 장에 나타나는 보아뱀과 모자는 우선적으로 시각적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느껴보자. 보아뱀, 코끼리, 모자의 감촉은 어떤 느낌일까? 나였던 그 아이가 느꼈을 감촉과 나인 그 아이가 느끼게 될 그것은 어떻게 같고 어떤 점이 다를까? 그리고 그 까닭은 무엇일까? 시각과 촉각이 추가되면 이전에 지각으로만 이해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 나의 감각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읽기 경험이다.
생텍쥐페리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가 고장 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 ‘완벽한 고독’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불시착과 이탈이라는 ‘기계적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는 절대 고독에 대한 당혹감이었을까? 그 당혹감을 넘어 어느 순간 느꼈을 완벽한 고독의 충일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막에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 사방을 둘러봐도 모래언덕뿐일 환경, 그 모래밭에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노란 모래와 뒤섞이는 햇살의 교합이 빚어내는 짙은 색감은 과연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정작 일상의 나는 하루에 몇 차례나 그 햇살의 부피와 온도와 색감에 주목하고 마음껏 느끼기 위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있을까? ‘나인 그 아이’로서.
사막에서 지는 해는 어떤 모습일까? 그 장면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것이다. 고립무원의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을 만큼 장관일 것이다. 사막에서 해가 자취를 감춘 뒤 급격히 떨어지는 온도를 느껴본다. 사막은 일교차가 가장 심한 지역 가운데 하나다. 극상의 더위에서 극강의 추위로 급변하는 기온을 모든 피부로 느껴본다. 모든 감각과 세포들이 다 살아난다. 그저 단 한 쪽 분량도 되지 않는 모습이지만 오감을 열어두고 읽어내는 책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다. 언제 그런 감각을 깨워보았던가.
바람소리 말고는 어떠한 소리도 진공의 감옥에 갇힌 듯한 밤의 사막. 고요와 적막만 가득한 곳의 밤이 주는 가청범위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러다 아침녘에 ‘이상한 꼬마’ 목소리에 깨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놀라움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꼬마의 목소리는 생뚱맞다. “저…… 양 하나만 그려줘!” 그 꼬마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그 그림 속 주인공이다. 긴 망토에 어깨에는 별을 달았고 보라색 장화에 칼을 지팡이처럼 땅에 딛고 있는 그 소년의 모습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느낌이었을까.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운 모습일 것이다. 그 소년이 요구한 뜬금없는 ‘양 그림’이라니! 늘 반복되는 삶은 일정한 노선을 왕복하는 기차나 버스와 비슷하다. 궤도를 이탈할 일 없는 기차와 약속된 정류장을 거치며 가다 서다 반복하는 버스는 지루하지만 안정적이다. 기차가 궤도를 벗어나는 건 탈선이다. 버스가 다른 길로 꺾어 드는 건 당혹이다. 그러나 비로소 그 순간 우리는 늘 반복되는 삶의 순치에서 깨어난다. 그런 일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은 어제와 비슷한 하루일지 모르지만 어제와 같은 하루는 아니다.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이 어제와 다르고 햇살도 어제와 같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반복되는 날들로 느낀다. 그렇게 다른 사람, 다른 기온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전혀 다른 하루다. 그게 그 소년의 출현과 무엇이 다를까.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도 놓칠 수 없지만이미 그것은 처음 읽었을 때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인지했지 않은가 이제는 내가 던진 물음과 느낌에 충실하게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 이제 모든 일의 중심은 모든 감각으로 그것을 읽어내는 ‘나 자신’이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