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그 디오라마
115cm, 15kg, RH+A형. 양안 1.2.
학령기 첫해의 신체검사 기록은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이후의 기록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혈액형은 평생에 걸쳐 RH+O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런 것들도 잘못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내게는 없다. 사실상 부모의 혈액형은 각각 AO, BO형이었기에 두 경우 모두 가능했으나, 당시 자신의 혈액형을 아내와 같은 BO형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의심을 샀다. 상식으로 널리 알려진 기초적 생물학 지식과 오쟁이 질 걱정이 낳은 비극이었다. 그 일이 나를 잠깐 멀리 보내는 데 일조했다.
키와 몸무게에 관한 기록도 수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고작 115센티미터의 여자아이가 왜 교실 맨 뒷줄에 앉아 있었을까. 언제나 몸집이 작았던 건 사실이지만 3.8킬로그램으로 태어난 내가 그 나이에 15킬로그램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나는 언제나 학급에서 키가 가장 큰 편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여덟 살 아이들의 평균 신장 수치를 조사해보아도 115센티미터는 결코 큰 축에 든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키가 컸고, 초경 이후 3년 만에 성장이 멈췄는데도 170센티미터에 달했다. 언제나 교실 맨 뒷줄에 있었다. 그해 학급 인원은 마흔여덟 명, 네 분단은 열두 명씩 채워졌고 여섯 줄에 걸쳐 두 명씩 앉았다. 교실은 한없이 넓었고 칠판도 아득히 먼 듯했다. 담임교사의 판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핑계 대기에 충분했다. 나는 맨 뒷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첫 신체검사 기록을 두고 부모가 어떤 갈등을 빚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 한 채 나는 날마다 부모를 졸랐다. 칠판에 무슨 내용이 적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짝꿍의 노트 필기를 빌려 베껴야 했다. 짝꿍이 온순한 남자아이라면 선뜻 노트를 내주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구박하곤 했다. 이 눈병신아, 안경을 써, 이런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나를 학교 앞 안경점에 데려갔다.
시력검사 결과 학교에서 나눠 준 신체검사 기록과 다소 다른 양안 0.8의 결과가 나왔다. 정직한 안경점 주인은 근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안경을 쓰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시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0.8은 반드시 교정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라 했다. 그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담임선생에게 앉은 자리를 조정해달라고 말해보는 것도 괜찮을 텐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쇼케이스 너머에 있는 목걸이가 달린 빨간 뿔테 안경을 가리키며 나는 키가 커서 절대 앞으로 갈 수 없으리라고 주장했다. 나는 언제나 뒷줄에 앉아야 해. 어머니는 요즘 아이들은 안경을 쓰는 게 멋인 줄 알고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고 안경점 주인에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내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빨간 안경을 사 주었다. 키와 몸무게와 혈액형과 시력에 관한 착각과 오류와 오기. 어머니 말대로 다른 애들처럼 액세서리로서의 안경이 탐나서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주장했다. 정말로 그때부터 칠판 글씨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사물이 두세 개씩 겹쳐 보이는 난시 현상도 경험했다. 양안 1.2라거나 0.8의 기록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곳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내가 잠깐 죽었을 때 다녀온 곳.
이후의 삶에서 나는 실제로 바닥으로 떨어진 시력 때문에 고생했고, 지금은 시력 교정 수술을 받아 양안 1.0이 되었으나 언제든 다시 그때로 돌아가리라는 두려움에 종종 사로잡힌다. 눈이 멀어버리던 순간. 가끔 꿈에서 나는 그날처럼 초상 사진을 찍고 있고,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영혼이 내게서 달아나는 분명한 감각을 느낀다. 영상미디어과 재학 시절 괴테의 잔상 효과에 대해 배우면서, 어디까지나 카메라는 인체의 시각에 대한 불신으로 발명된 기계이고 콜로디온 습판으로 초상 사진을 찍던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영혼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나도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중세와 근대에 걸쳐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더욱이 사진이론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초상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달아나버린다는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은 영혼을 빼앗아갈 수 있는 근대의 무기다…… 요즘 들어 날마다 그 말을 실감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였다. 그 일로 우리 회사는 거의 10년 만에 대형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기왕에 뭇사람들의 반응, ‘그 회사 아직도 있어?’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도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나 검색엔진의 일반명사로서 이 회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학에 다니던 10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외국계 포털 사이트로서 우리 회사의 명성은 구글보다 앞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기야 당시는 ‘매킨토시’라는 명사가 통용되던 때이기도 했으니까. 그만큼 옛날이지만 아쉽기는 했다. 내가 입사한 후 회사는 퇴락일로를 걸었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은 우리 회사의 이름을 들으면, 그게 아직도 있어? 하고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한때 검색엔진의 대명사였던 회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나는 가끔 진지하게 말했다. 기억 안 나? 우리 학교 앞에 그 이름 딴 술집도 있었던 거. 이런 말도 동기들은 일종의 자학개그로 받아들였다. 명함을 보자마자 실소를 터뜨리는 녀석도 있었고, 회사 인트라넷 메일 주소를 보며 나도 남들과는 다르게 여기서 메일을 만들어볼까, 지껄이는 녀석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했을 때, 당시 회사는 종로 시내 한복판 커다란 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어젠다구나, 나는 그곳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구나, 생각했었다. 우리 회사만 입주한 빌딩도 아닌데 그곳이 마천루라는 사실이 어찌나 나를 벅차게 했는지 모른다.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졸업식도 하기 전에, 이름난 외국계 회사에 입사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옛날이야기다.
그해에 스마트폰이 생겼고, 수많은 포털 사이트와 검색엔진에서 모바일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날 때 나는 그들을 죄다 얼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카메라면 카메라고, 핸드폰이면 핸드폰이지, 여러 기능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조잡스럽다고 생각해서 그때까지 ‘폰카’도 사용해본 적 없는 나였다. 나는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어본 적도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데스크톱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돌아다니며 하고 있다니. 한국인만큼 인터넷을 무분별하게 많이 사용하는 족속도 없다는데 스마트폰의 도래는 흉흉했다. 회의 시간에 당당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하거나 받아 적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경악하곤 했다. 업무 시간에 무례하게 전화기를 꺼내 든단 말이야? 이런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놀라울 만큼 고루한 생각이다. 고릿적부터 웹2.0 시대를 읊고 다녔던 부장을 포함해서, 직원 모두가 나같이 생각한 것은 아닐 텐데 단언컨대 스마트폰 이후로 회사는 망했다.
이제는 대부분 알고 있다. 결국 플랫폼을 스마트폰에 적합한 형태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것이 몰락의 시초였다는 것을. 스마트폰은 이제 사람들의 육체 일부가 되었다. 시나브로 메일 서비스, 커뮤니티, 개인 블로그, 아카이빙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용자가 줄어들었고, 동기 녀석들의 반응처럼 회사의 이름은 한물간 브랜드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아직도 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언제나 징후는 보였으나 사실이 아니었던 종말을 기어이 목격하면서.
회사는 더 이상 종로 시내 한복판 마천루에 입주해 있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그럴듯한 ‘홍보팀’ 소속 지원이 아니었지만, 공간과 소속은 자꾸 분절됐다. 1년 전 다마스 용달에 짐을 싣고 종로를 떠나 문래동으로 올 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까. 이제는 떠나가볼까. 종말을 믿으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하 벙커의 광신도가 된 기분도 잠시 들었다.
문래동에 이사 간 후로는 타이완에 있는 본사의 지시로 국내 웹툰 회사와 통합했다. 스타트업으로 출발해 규모를 제법 키운 회사였으나 저질 콘텐츠 일색인 곳이었다. 그 회사 사이트에 있는 성인물 웹툰을 몇 편 보다가 기가 막혔다. 수십 개 웹툰이 올라와 있었지만 전부 폭력적인 내용뿐이었다. 특히 ‘몰카’ 피해자 여성의 고통을 다룬답시고 도리어 그 캐릭터를 착취하는 방식은 그야말로 익스플로이테이션 장르물 그 자체였다. 더구나 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뜨는 팝업 창은 전부 유사 성매매 광고물 일색이었다. 이런 것을 만지는 사람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다니,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던 것 같다.
그날 사방팔방에서 다마스 용달이 속속 허름한 건물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는 8년차 과장이었지만 신병교육대대에서 이제 막 군번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주눅 들었다. 종로에 있던 사무실보다 더 작은 사무실에 낯선 직원들과 섞여 앉으려니 난처했다. 입사 동기들과 회사 근처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탄했다. 어차피 잘난 사람들은 좋은 회사에 다 스카우트되어 갔으니 남은 우리들은 진짜 순장조인지도 몰라. 담배를 세 대째 피우는데 웹툰 사이트 부장이 골목 끝에서 도끼눈을 뜨며 나타났다. 여직원들이 단합하는 문화 좋네요?
오늘도 여직원들끼리만 단합해보려고 하는데 어때요?
여직원들끼리만. 나는 그 말에 담긴 함의를 잘 알고 있었다. 웹툰 사이트 부장은 기선 제압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3년 전쯤이었다면 어땠을까. 기세등등 합석해서 한번 대결해보려 들지 않았을까. 그들의 콘텐츠를 두고 은근슬쩍 비아냥대면서. 통합이라고 해도 너희는 우리 회사의 식민지로 들어온 것과 같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한없이 무기력했다.
아니, 저희는 됐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끄고 자리를 떴다. 그때 웹툰 사이트 부장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일별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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