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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작은 나라다
‘아파트’ 하면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무엇이 떠오를까? 우리에게 아파트는 단순한 주거 공간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아파트는 욕망의 대상, 즉 돈벌이 대상이기도 하다. 이 욕망의 대상을 ‘주거의 대상’으로 바꾸는 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것이 지금 내가 하는 일이지만, 나에겐 아파트 하면 ‘입주자대표회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파란만장한 입주자대표회의의 회장을 한 빈도 아니고 두 번, 그리니까 4년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가 아파트 동대표, 나아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되려고 했을까. 내게 집은 그냥 쉼의 공간이었는데, 동대표로 출마하기 전에는 관리사무소가 어디에 있는지, 동대표가 왜 필요한지도 몰랐으니 더 말해 뭐할까 싶다.
통장이 있는데 동대표가 왜 필요할까
동대표는 대체 왜 필요한 걸까? 통장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동대표가 필요한 이유는 아파트가 공동주택이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함께 관리해야 할 공유부분이 있고 각 세대가 책임져야 할 세대부분이 있다. 각 세대부분의 관리, 예컨대 도배, 장판, 인테리어 등은 각 세대가 자기 돈을 투입해 스스로 관리하지만 주차공간, 아파트 내 도로, 각 동 앞의 화단과 조경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배관, 큰돈이 들어가는 도색, 엘리베이터 교체 등은 개별 세대가 관리할 수 없다.
함께 사용하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날 때마다 원인을 밝혀내고 원인 제공자를 가려내 비용을 부담하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아파트는 단독주택과 달리 ‘공동’으로 관리해야 할 부분이 있어 ‘공동주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공유공간은 아파트 소유권자들의 재산이고, 공동재산인 공유공간을 관리하려면 재산권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아파트를 공공이 관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아파트 소유자 중 아파트 관리의 책임을 맡을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이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해 아파트의 관리·운영을 전담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관리사무소를 두는 것이다.
그렇다. 단독주택과는 다른 아파트의 특수성으로 인해 입주민들이 대표를 선출하고, 대표들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가 관리비를 얼마를 거둘지, 공유부분의 수선을 어떻게 할지, 장터 운영자를 어떤 방식으로 선정하고 운영할지, 재활용품 판매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어디에 얼마만큼 쓸지를 결정한다. 종합해 보면 아파트 운영에는 결국 대의민주주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파트의 모든 권력은 입주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아파트를 ‘작은 나라’라고 부르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듯, 아파트에서 선출된 대표들과 관리사무소는 각 세대의 재산을 보호하고 입주민의 기본 안전을 책임진다. 나라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아파트의 모든 권력도 입주민으로부터 나온다.
나라에서 세금을 거두듯 아파트에서는 관리비를 거두고, 거둔 세금으로 공무원 급여를 주듯 아파트에서는 관리비로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경비원 및 미화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며, 나라에서 세금으로 도로와 각종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유지·보수하고 가로등을 고친다. 국가에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있듯이 아파트에서도 대표를 선출하는 기구인 선거관리위원회를 별도로 조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운영을 동대표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공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관리비도 함부로 올릴 수 없다. 운영의 기본 틀을 제시하는 공동주택관리법이 있고, 공동주택관리법 하위에 아파트마다 각각 관리규약과 규정을 둔다. 법과 원칙을 벗어나 아파트를 운영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를 헌법과 법률에 따라 운영하는 것과 똑같다. 국가의 헌법을 개정할 때 국민투표를 거치듯이, 각 아파트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관리규약을 개정할 때 역시 입주민들의 찬반·동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정치학을 전공한 내가 이 원리를 깨우친 것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다. 참 한심한 일이다. 한 나라와 다름없는 ‘작은 공화국’에 살면서 그 운영원리에 무지했으니 말이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고 좋은 방안을 모색하면서 정작 마을 일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시끄러운 이유
그런데 입주자대표회의는 왜 그렇게 시끄러울까? 아파트는 왜 ‘민주주의’의 ‘민’ 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몰상식의 경연장이 되어버렸을까? 어떤 이는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무능을 탓하고 수준 낮은 동대표들을 지적하지만, 내가 보기에 근본 원인은 입주민들이 과거의 나처럼 아파트 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원찮은 입주민이 동대표가 되는 것이고, 엄청난 비리가 발견되어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물론 무관심을 조장하는 제도가 근본 원인인데, 이 내용은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아파트 비리가 드러나면 입주민들이 관리사무소를 방문해 동대표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핏대를 올리지만, 냉정하게 말해 문제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무능한 국회의원을 선출해놓고, 아니 국회의원 선거 날에 여행이나 가면서 국회가 일하지 않는다고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회나 행정부, 그리고 가장 작은 단위인 시의회에도 감시하고 참여하는 미디어와 시민이 있지만, 아파트는 대다수 입주민이 무관심하니 감시 기능이 작동할 리 만무하다.
악화가 양화 구축하는 입주자대표회의
우리나라 아파트의 연간 관리비 총액이 무려 15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어마어마한 돈의 용처를 바로 동대표들이 결정하기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 입주자대표회의는 각종 공사에서 뒷돈을 챙길 욕심이 있는 사람들, 관리사무소 지원들에게 ‘회장님’ 또는 ‘대표님’이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 정기회의 때 지급되는 회의비나 임원 수당을 생활비에 보태고 싶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입주자대표회의를 이런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으니 상식적인 사람들은 더 멀리한다는 점이다. 바쁘기도 하고 괜히 관심을 가졌다가 낭패를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곳이 바로 입주자대표회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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