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인간이라는 한계,
인간이라는 구원
우리는 숨을 쉬듯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지만 당신과 나 역시 한 발만 잘못 디뎠어도 다른 삶을 살게 됐을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살았을 삶을 대신 살고 있는 자들을 비웃으며 살고 있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바라건대, 스스로를 믿지 않기를. ('프롤로그' 중에서)
사람은 어떻게 흑화하는가
어이, 친구. 거기 혼자서 뭐 하고 있나? 나하고 얘기 좀 하지. 아, 날 어디서 본 적이 있다고?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슬픈 눈, 그리고 찢어진 입술. 그렇지. 사람들은 날 ‘조커’라고 부른다네.
아까부터 자네를 지켜봤네. 화가 좀 나 있는 것 같더군. 자꾸 화가 난다고? 자네를 무시한다고? 누가? 곁에 있는 동료들이? 상사가? 그렇다면 내 조언이 필요하겠군. 지금부터 내 얘기를 잘 들어보게. 친구.
사람들은 내가 흑화했다고 말하지. 흑화黑化.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검게, 냉혹하고 잔인하게 변하는 걸 이야기하지. 난 흑화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네. 알을 깨고 나와 아프락사스를 만나는 순간인데, 그걸 왜 나쁘다는 건지 모르겠더군.
흑화는 절대 나쁜 게 아니네.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니까. 남들보고 왜 날 안 봐주느냐고, 언제까지 졸라댈 건가.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지 않겠나. 그게 더 성숙한 자세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쁘게 살면 안 된다” 맨날 그 타령이지. 토머스 웨인 같은 작자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거지.
생각해보라고. 자네가 왜 무시당하고 사는지. 그건 만만하기 때문이네. 자네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말대꾸도 제대로 않겠나? 정말 별거 아니라고 여기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만약에 자네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는 못할걸? 네버Never. 절대로.
지금 자네 모습을 보라고. 사람들이 두렵고 한없이 위축되지? 저 사람이 날 어떻게 하지 않을까. 혹시 나를 불러서 싫은 소리 하지 않을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그건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네. 내가 왜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병에 걸렸는지 아나? 그건 두려움과 좌절감 때문이지.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말했네.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유머가 사람이 좌절했을 때 생겨나는 몇 가지 반응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개는 문이 열리지 않으면 문을 긁거나 땅을 파거나 으르렁거리는 따위의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데, 이는 좌절이나 놀라움 또는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나라 없는 사람》, 문학동네, 2007)
정말 힘든 것은 웃음으로도 두려움 자체를 없애진 못한다는 사실이네. 두려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지. 다시 상처받고, 다시 실패하고, 다시 따돌림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지.
우선은 몸을 잔뜩 웅크리는 방법이 있네. 언제 괴로움을 당할지 모르니까 최대한 방어 자세를 취하는 거지.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 가 안전함을 추구하며 사는 거라네. 그렇게 소시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비겁하단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것도 뭐,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네.
다른 하나는, 적절하게 타협하고 사는 방법이 있네. 마음속으론 순수성을 지킨다고 믿으면서 밖으로는 악마와 악수를 하는 거지. “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관행이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들 변명을 하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네. 뭐,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네.
이 두 가지 말고 다른 방법은? 있네.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가는 길. 바로 내가 택한 흑화의 길이지. 겁내지 말게. 결코 어렵지 않네. 내 영화를 보고 어떤 관객이 인터넷에 남긴 ‘한 줄 평’, 기억나나? “착하게 사는 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지만, 포기하고 내려갈 때는 너무나도 빠르고 즐겁다.” 바로 그거네. 착하게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 정말로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고 즐겁게 내려갈 수 있지.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되는 거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메시지만 확실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되네. 흑화를 하고 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다”고. 비극과 희극은 사실 동전의 앞뒷면이라네. 뒤를 앞으로 돌리면 되는 거야.
흑화했다고 꼭 나 같은 악당만 되는 건 아니라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 중에도 흑화한 자가 적지 않지. 잘나가는 사람들이 왜 흑화를 하느냐고? 생각해보게. 평소엔 누구나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지. 시련이 있기 전까지는. 그런데 승진 인사 같은 것에서 한두 번 물을 먹고 나면 사람이 변하네. 그것도 한순간에.
왜 내가 경쟁에서 졌을까. 내가 어떤 대목에서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되지.
“그래! 너무 원칙을 지키려고 했던 게 문제였어. 이제부턴 바보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일단 마음을 먹으면 사고방식도 빠르게 구조조정이 되지. 아까 얘기하지 않았나. 정말 빠르고 즐겁다고. 명분이야 좋은 머리로 뚝딱 만들어내지.
“내가 이러는 건 다 조직을 위해서야.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니야.”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나중에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야.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그렇게 흑화는 완성되네. 웃기는 건 흑화를 하면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걸세. 눈빛부터 달라지기 시작하지. 유연했던 사람이 갑자기 고집을 피운다든가, 마음 터놓고 대화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벽창호처럼 느껴진다든가, 그럴 땐 흑화를 의심해보게.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네. 자기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지. 자기 맞은편에 서 있는 인간은 동등하게 대우할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 맘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네. 검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검게 보이는 거랄까.
한국의 군부독재 시대를 떠올려보라고. 숱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조작돼 수사받고 재판받지 않았나.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허위 진술을 했다.” 법정에 선 시민들이 눈물 흘리며 호소했지만 판사들은 독재자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감옥으로 보냈지. 그 판사들은 왜 그랬을까.
“밝혀낸 증거가 부족할 뿐이다. 그자들은 간첩이 분명하다. 수사받으면서 고문 좀 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간첩이란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이게 당시 재판장이었던 한 법조인의 말이라네. 정권의 손짓에 따라 판결하면서도 스스로는 양심적이라고, 다 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정당화한 거지. 인간이란 알면 알수록 참 재미있는 존재야. 자신이 가진 지능만큼 악해지기도 하니까.
흑화한 다음에 하는 말들도 다들 비슷하다네. 후배들에게 마치 후일담처럼 말하지. “그때 많이 배웠다”고. ‘그때’는 자신이 승진 명단에서 누락됐거나, ‘조직의 쓴맛’을 봤을 때를 말하네. 그럼, ‘많이 배웠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신이 흑화한 것이 아니라 성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거라네. 진정한 ‘프로 직업인’으로 거듭났다는 거지.
그렇게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도 들더군. 일부러 한 텀기간 늦게 승진시켜서 흑화시키는 매뉴얼이 조직마다 비치돼 있는 건 아닐까. 설마 그렇겠느냐고? 자넨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걸 모르나?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고. 조직에서 잘나가는 인간들을. 오너나 상관 앞에서는 자기 간이라도 빼줄 듯이 살갑게 굴다가도 직원들 앞에만 서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오너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고?
이보게, 친구. 그들은 다 알고 있네. 알고도 모르는 척할 뿐이지. 왜냐고? 그게 편하거든. 말 잘 듣는 ‘나쁜 놈’ 하나가 분위기를 휘어잡으면 오너 자신은 품위 있게, 우아하게 웃고만 있으면 되거든. 그 ‘나쁜 놈’이 조직을 망가뜨릴 지경이 되면 다른 ‘나쁜 놈’으로 대체하면 되는 거고….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