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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릴레이 경주,
어떻게
멈출 것인가
21세기에 상속은,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시작된다
지금까지 어느 정도 진단과 분석을 했으니 대안과 정책을 살펴볼 차례다. 적어도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이라면 검찰개혁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보완첫 번째 층위하거나 공정 경쟁 구도를 손보는 수준두 번째 층위에 그치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공정은 일차적으로 불평등 해소세 번째 층위를 통해서 확보된다. 하지만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불평등은 단지 기성세대에게 유리한 노동시장의 연공서열 체제를 직무급으로 교체하는 등 국지적인 제도 보완만으로 완화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식의 처방이 효과가 있었다면 미국을 포함해서 연공서열 체계가 강력하지 않은 서구에서는 한국사회만큼 불평등이 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미국의 불평등 수준은 한국보다 심하다.)
더욱이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불평등은 마지막 층위, 즉 불평등의 대물림과 세습을 멈추는 대안 없이는 근본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이는 정책적으로 보면 신성불가침의 사적 재산권에 도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사적 상속이라는 통념을 바꾸는 정책의 도입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로 강도 높은 개혁이 가능하려면 정치적 지형 안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재산권과 사적 상속제도에 도전하는 정책들을 기존 586세대가 수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책을 수용하고 실현할 의지를 가진 새로운 정치 세력 형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또한 세습이 능력을 압도하는 사회적 상황에 맞춰 세습의 주요 기제인 상속과 유산의 개념도 다시 정의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상속이라고 하면 부모세대가 사망하면서 남긴 유산을 물려받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저출산·고령화 및 장기적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경제 사이클에 의해 이런 상식은 깨지고 있다. 옛날처럼 부모가 사망한 이후에 유산을 받고, 이를 토대로 자녀들이 자산가가 된다든지 하는 광경은 2020년대에는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다.
오히려 진짜 중요한 상속은 부모가 살아생전에 자녀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이뤄지게 된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봐도, 점점 더 오래 살게 된 부모들이 꾸준히 자녀들을 지원하는 자산 비중이 훨씬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다 보면 “특권층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부모가 살아생전에 자녀에게 주는 돈과 증여가 사망 시에 일괄적으로 상속되는 재산보다 세대 간 전달에서 한층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온다.(McNamee, 2013)
이뿐만이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가진 다양하고 특권적인 인맥을 활용할 수 있게 되므로 사회적 자본 역시 통째로 상속받게 되는 셈이다. 또한 부모가 누리는 각종 문화자본 역시 부모 살아생전에 가정의 일상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상속될 가능성이 높다. 비록 부모가 직접적으로 학력과 직업을 물려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에 준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상속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상속은 후손에게 전해지는 많은 양의 재산 그 이상이다. 좀 더 포괄적으로 정의하면, 상속은, 어떤 사람의 출생 시에 전해진 최초의 사회계층이 미래의 인생에 미치는 총 영향을 뜻한다. 자녀들에게 특혜와 우위를 물려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슈퍼리치만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특권층이라고 할 만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특권과 우위를 물려받는다.”(MaNamee, 2013)
결론적으로 21세기에 상속은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시작된다. 자녀교육, 인적자본 형성 등의 과정을 통해서, 부모의 인맥 규모와 질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자본의 충분한 향유를 통해서, 그리고 부모가 지닌 문화자본의 공유와 자연스런 전달을 통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나아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순차적이고 체계적으로 상속이 일어난다.
분노에 잠식된 민주주의
능력주의는 원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간주되었다. 이는 어떤 대학도 학생을 학업성적에 따라 평가하고, 어떤 기업도 직원을 기술 능력에 따라 고용한다는 원칙이다. 어떤 연줄, 특혜, 연고, 세습의 영향도 없어야 한다. 능력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이런 믿음은 일종의 종교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 번 능력주의에 의해 키워진 한 세대의 엘리트들 앞에서도 언급했듯 미국의 베이비부머 세대와 한국의 586세대은 일단 사회를 지배한 이후, 사회적 산출의 압도적 부분을 가져갈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을 엘리트로 만들어내는 사회적 경로도 제도적으로 구축했다. 그 결과 기회의 평등은 사라지고 불평등은 심화되었으며, 기득권과 특권은 대물림된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능력주의와 평등화 기제는 한 세대를 넘지 못했고 두 번째 세대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능력주의 위계질서meritocratic caste order가 사회에 고착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스스로 부정했던 세습 구조를 다시 불러들이고 전대미문의 불평등을 초래한 능력주의의 함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사회의 불평등이 확실히 끝이난 계기는 “전쟁, 혁명, 국가의 붕괴, 전염병, 기타 참사들과 같은 치명적인 대재앙”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불평등이나 세습 해체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Scheidel, 2017)
그런데 능력주의에서 태어난 엘리트주의는 벌써 다른 암초를 만나 해체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그 암초는 바로 우익 포퓰리즘이다. 불평등이 세대를 넘어 확산·심화되는 상황을 정치가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자, 민주적 질서를 무시하는 우익 포퓰리즘이 발흥한 것이다. 이는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먹어 치우는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7,000달러를 넘어선 민주국가 가운데 전제 정부로 회귀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일정 수준의 번영에 이르면 민주주의는 강해진다.” 영국 정치철학자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학자 래리 다이아몬드Larry Diamond에 따르면 1970년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선거 민주주의’ 국는 35곳이지만 2006년에는 그 숫자가 119곳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런 데이터를 근거로, 일정한 경제 수준에 이른 국가들에서 선거 민주주의가 한 번 정착되면 정치적 상황이 뒤로 후퇴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고 사람들은 굳게 믿었던 것이다.(Runciman, 2013)
하지만 이 믿음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2016년 미국에서 우익 포퓰리스트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국내외적으로 민주적 질서를 교란시켜나간 것이 대표적 반증이다. 정점에 올랐던 선거 민주주의 제도는 여러 국가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프랑스 사회당을 위시한 수십 년 전통의 정당들도 하루아침에 군소 정당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반면 국민전선The National Front, 프랑스, 자유를 위한 당The Party for Freedom, 네덜란드, 독일을 위한 대안The Alternative for Germany, 독일, 자유당The Freedom Party, 오스트리아, 스웨덴 민주당Sweden Democrats, 스웨덴, 티파티Tea Party, 미국 등 극우 정당들이 세력을 얻어나갔다. 여기에 러시아의 푸틴, 터키의 에르도안, 헝가리의 오르반, 폴란드의 카진스키, 필리핀의 두테르테,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등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통치도 세계 곳곳에서 시작됐다. “지난 20년간, 공고한 정당 구도는 빠르게 녹아내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의 주변부에 있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정당들이 정치판에서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다.”Mounk, 2018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실 트럼프의 집권은 절대로 돌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상위 20퍼센트를 위한 정당정치
그렇다면 어째서 불가역적이라고 믿었던 선진국의 선거 민주주의 체계가 하나씩 포퓰리즘으로 오염되었을까? 세계 곳곳에서 이른바 민주주의 침체democracy recession가 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가 전문가나 엘리트 집단에 의한 통치로 사실상 대체되어오면서, 권력을 쥔 엘리트 집단이 시민들의 요구와 불만에 전혀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정치학자들은 진단한다.
“20세기와 21세기 초를 거치는 동안, 공무원 수는 그야말로 치솟았으며, 그들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또한 현저히 넓어졌다. 그 결과, 국민이 뽑은 대표들이 공공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격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30년 동안 서구의 정치는 법원, 관료 기구, 중앙은행, 초국가적 기구의 역할 증대로 특정지어질 수 있다. 동시에, 로비스트의 활동, 정치자금의 규모, 정치 엘리트와 그들이 대표하는 국민 사이의 거리 역시 크게 늘어났다. 그 여파가 하나가 되면서 정치체제는 국민의 뜻과 유리되어 버렸다.”(Mounk, 2018)
문제는 단순히 정부 조직이나 관료 집단이 엘리트들로 채워지고 이들이 시민들의 요구에 무감각하게 관료적으로 통치했다는 점만은 아니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시민과 관료를 매개하면서 정치의 역할을 높여야 할 정당들이 엘리트 전문가 집단, 혹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보수 정당은 물론 미국의 민주당이나 유럽의 사회민주당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토머스 프랭크는 미국 민주당이 이제는 노동자나 중산층 시민을 대변하기보다는 “지식경제의 승리자들, 즉 실리콘밸리의 두목들과 대규모 종합대학 시스템,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큰돈을 기부했던 월스트리트 거물”들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Frank, 2016 최근에 이 대목을 아주 신랄하게 지적한 사람은 불평등을 연구하는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다.
피케티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서구 선거에서의 투표 패턴을 분석한 결과 미국의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저학력 저소득 노동자 계층이었는데, 그 이후 상황이 바뀌어서 점점 더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을 한 최고학력 엘리트가 지지하는 지식엘리트 정당Brahmin Left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당은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지지하는 자산엘리트 정당Merchant Right이다. 그 결과 미국 정치 구조는 노동자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과 기득권 부유층을 대변하는 정당 간의 대결이 아니라, 지식엘리트 정당과 자산엘리트 정당 사이의 대결, 즉 기득권 내부성 안 사람들 사이의 대결 정치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구조를 꼬집어 다중 엘리트 정당 시스템Multiple elite party system이라고 부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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