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돌아보니 거친 글을 주로 써왔다.
난민 생활 20년 뒤 귀국이 가능해졌을 때 파리를 좌우로 나누며 흐르는 센 강변에서 소박한 다짐이 있었다. 우연의 산물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없었더라면 센 강변에서 배회하다가 소멸했을 존재의 자리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고 글을 쓰겠노라는 다짐이었다. 내 딴엔 그것이 자유인의 선언이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베스트셀러에 속했고 나의 형편을 다르게 했다. 그 책으로 나는 보잘것없지만 상징자본까지 갖게 되었고 언론고시를 치르지 않고 언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인 선언은 나를 지킬 만한 물적 조건을 갖게 된 자로서 오랫동안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연대의 표시이기도 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편서풍 때문일 것이다. 파리에 내리는 비는 머리에 떨어지지 않고 주로 얼굴을 때렸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중에 그 부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의 전문을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밤비가 오지 않아도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를 되뇌곤 했다.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상의 후렴구 같은 것이었는데, 마침내 그것을 멈추게 되었을 때, 사병으로 남겠다는 소싯적 의지가 오롯이 되살아났다. 장교는 나이를 먹으면서 진급한다. 사병은 나이를 먹어봤자 사병으로 남는다. 실제 전투는 주로 사병이 한다. 하지만 거의 모두 사병으로 남지 않고 장교가 되려고 한다. ‘그래, 그럼 나는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젊은 시절에 호기롭게 가졌던 생각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이방인 생활이 20년 넘게 이어졌지만, 그 시간은 한국에 있었더라면 가능했을 수 있는 ‘철든 장교로의 진급’과도 무관했다. 내 정서는 한국을 처음 떠났을 때의 나이인 30대 초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귀국 후 동기 동창생들을 만났을 때 희한한 경험을 했다. 대부분 세속적인 출세에 성공한 그들의 품새와 말투 때문이었는지 자꾸만 그들이 한참 선배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나랑 동기생이야!”라고 되뇌곤 했다.
20년 동안의 난민 생활이 나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 이른바 ‘KS’ 출신으로서 가질 수 있는 우월의식, 엘리트 의식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그런 의식을 없애야 한다고 다짐했어도 쉽게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은 또 흘렀고 적잖은 선배와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으로 이끈 고교 동창생 박석률도 3년 전에 세상을 떴다. 모진 고문과 오랜 수감 생활을 겪었던 그는 끝내 이 세상의 광영과는 티끌만치의 인연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오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문장이 자주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던 덕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청년 시절 잠시 중앙정보부 6국과 치안본부 ‘남영동’의 전신인 서울시경 대공분실과 보안사령부 서빙고동 취조실에서 단련을 받기는 했지만, 남민전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처럼 소심한 사람에게 오랜 수감 생활 이전에 남영동이나 중앙정보부에서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만으로도 나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부정하는 데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성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었던 시간에 나는 우아하고 경쾌한 파리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초승달 빵크루아상을 먹었고 담배를 피우며 〈르 몽드〉 신문을 읽었다. 내 몸과 정신에 국가 폭력의 상흔이 녹아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을 만큼 마모되고 피폐해지지는 않았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철권통치가 관철되던 197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땅을 떠나 오를리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사람들이 중력 없는 땅에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약동하는 자유의 환영幻影과 같은 것이었다.
“착하면 손해 본다. 그래도 넌 착한 사람이 되어라!”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묵묵히 들었던 건 꼭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보다 꽤 괜찮았던 학교 성적이 자신감을 갖게 했던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까짓것 손해 좀 보지 뭐!” 손해를 좀 봐도 남는 게 있을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순진했거나 오만했거나 둘 다였다. 그때 나는 “꿩도 먹고착하게 살기 알도 먹는편하게 살기” 황금분할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 그런 황금 분할의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착하게 살기가 조금 손해 보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편하게 살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외할아버지한테서 들었던 ‘개똥 세 개’ 이야기가 내 가슴을 적신 뒤부터 나에게 착하게 살기는 순응하며 살기가 아니라 올바로 살기, 인간답게 살기로 자리 잡혔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김학철 선생은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맞서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서 편하게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것은 대구對句를 이룬다.
편하게 살기와 인간답게 살기를 정면으로 충돌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롭고 존엄하게 태어난 인간에게 온갖 억압 기제로 굴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다. 김학철 선생이 살았던 세상과 내가 아직 살고 있는 세상, 그리고 앞으로 후배들이 살아갈 세상은 자유를 억압하거나 왜곡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를까? 나의 젊은 영혼을 옥죄었던 국가 물리력에 의한 고문 행위와 그에 대한 공포심을 젊은 후배들이 겪지 않게 된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권위주의 군사독재체제에서 벗어나는 아주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으나, 그러고는 거기서 멈추었다. 간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회악으로 일곱 가지를 꼽았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헌신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그가 꼽은 일곱 가지 사회악은 이 땅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신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했던 간디의 또 다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진 자와 힘센 자의 탐욕은 가진 자와 힘센 자의 것이어서 통제되기 어려운데,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란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존 조건도 충족하기 어려운 세상을 말할 것이다. 인간이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 물질의 결핍 상태가 지속될 수 있으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자유나 사람됨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그의 소유물과 그가 속한 집단, 계층에 관심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가 가진 구매력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1차적 관심사는 자신의 은행 잔고”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시사하듯, 구매력을 높이거나 유지하기 위한 긴장만 남은 것, 그래서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 형성의 자유를 일찍부터 내던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한국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모습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청년 시절부터 품었던 호기로운 생각,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으로 남고자 하는 자의 안간힘이라는 것을 안다.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정의로운 세상, 조금은 더 자유가 확장되고 약동하는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게 우리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끝내 철들지 못한 것도, 그런 안간힘에서 비롯되었다고 변명하는 것까지.
오늘처럼 군력과 물질이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에 지배와 복종에 맞서겠다는 자유인은 모순적 존재일 수 있다. 자유인으로 남기 위해서는 세속 사회에서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사에서 반지배주의자아나키스트는 자유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거의 숙명처럼 패배자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가령 마오쩌둥의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이념 이전에 정서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총을 들었지만, 그것은 폭정에 저항하기 위해서였지 권력을 장악하여 지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반지배주의자들이므로. 『패배자의 회고록』의 저자 미셸 라공은 “난 확신하오. 패배자들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따. 반지배주의자인 주인공은 러시아혁명과 스페인전쟁을 거쳐, 68혁명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아 자신과 동료들의 패배를 증언한다. 빅토르 위고가 소설 『93년』에서 “혁명의 절대성 위에 인간의 절대성이 있다”고 말했던 것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 자체에 인간과 사회를 배반할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강제력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의 자발적 연대를 꿈꾼 반지배주의자들은 전쟁을 멈출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 단계의 인간 세상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또한 안간힘으로 말했을 것이다. “패배자들에 대한 기억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계속 노예로 편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편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앞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는 점점 더 힘을 잃고 있다. 이 거친 글은, 감히 말하건대, 한국 사회라는 산山에서 내려오는 한 선배가 산에 오르는 젊은 후배와 만났다고 가정하여, 누구의 어법을 빌려 다시 또 감히 말하건대,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게 하고 싶은 안간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령 그 후배가 소수도 아닌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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