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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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3층 에메랄드홀에 들어섰다. 하객이 400명이라고 했나. 체감상으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돼 보였다. 나는 단상 근처의 지정석에 앉아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불문과 동기들이 저마다 다른 속도로 늙은 얼굴을 하고서 앉아 있었다. 근데 도대체 몇 명이야. 재희가 그간 동아리 술자리며 학과 홈커밍데이 같은 데에 불러주는 대로 넙죽넙죽 갔던 결과가 이것이로군. 이럴 때 보면 재희의 친화력은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최소 5년에서 심하게는 10년 만에 만난 동기들과 안부 비슷한 걸 나누었다. “너 작가 됐다며. 축하해.” “연락 좀 하고 살아라.” “애들 사이에서 너 죽었다는 소문 돌았는데 멀쩡하네.” “네 소설 어디서 볼 수 있어? 인터넷에 찾아봐도 없던데.” “근데 글 쓰느라 많이 힘들었나보다. 살이 엄청 쪘네.” “너 아직도 술 그렇게 마시냐……”
내 책은 조만간 나올 예정이며, 술은 많이 줄었다. 늙고 살찐 건 너희도 만만찮은데 자꾸 이런 식이면 왕년의 술버릇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30대의 사회인답게 교양을 차리며 대충 웃음으로 눙쳤다. 누군가가 내 소설을 봤다고 하면, 다 지어낸 거라고 해야지. 괜히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내가 웃겼다. 자의식 과잉도 병이라면 큰 병이었다.
― 잠시 후면 예식이 시작되오니 하객 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결혼식 사회를 맡은 남자는 재희 남편 될 사람의 친구라고 했다. 하관이 빨고 피부가 번들거려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심한 것이 진행 솜씨도 별로인 것 같았다. 방송기자라고 했나? 내가 훨 낫겠구만. 그놈의 관례가 뭔지, 괜히 심술이 올라왔다.
단상 옆 커다란 스크린에 재희와 그의 신랑을 찍은 사진이 떠올랐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화질이 떨어지는 두 남녀의 사진을 보며 나는 레드와인을 연거푸 들이켰다. 얼마 전에 기업은행으로 이직했다는 철구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 근데 너 솔직히 말해봐. 너랑 재희랑 뭐냐. 소문이 사실이냐?
소문은 사실인데 재희한테 들이대다 대차게 까인 철구, 네가 할 소린 아니지.
*
스무살의 여름, 재희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술을 사주기만 하면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술버릇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연령 미상의 남자와 이태원 해밀톤호텔의 주차장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의 클럽에서 데낄라를 여섯잔쯤 얻어먹은 상태였을 것이다. 달빛과 가로등과 온 세상의 네온사인이 나를 비추고 있는 것 같았고, 귀에서는 연신 카일리 미노그의 일렉트로닉 넘버가 흘러나왔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단지 내가 그 어두운 도시의 거리에 누군가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때문에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온 힘을 다해 혀를 섞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위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고 믿게 될 즈음, 누군가가 나의 등을 세게 쳤다. 잔뜩 취한 와중에도 이건 혐오범죄가 분명해, 드라마 퀸다운 상상을 하며 포갰던 입술을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여차하면 몸싸움을 불사하리라 마음먹고 주먹을 꽉 쥐었는데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재희였다. 언제나처럼 필터에 립스틱이 묻은 말보로 레드를 쥔 채로.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재희는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숨도 안 쉬고 웃었다. 그러곤 특유의 큰 성량으로 외쳤다.
― 아예 먹어라.
나도 모르게 뭐래,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고 그러던 사이 나와 키스를 하던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 심지어는 그가 누구였는지조차 이제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재희와 내가 주차장에서 나눴던 얘기는 대충 기억이 난다.
― 학교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줄 거지?
― 당연하지. 내가 돈은 없어도 의리는 있다.
― 근데 너 안 놀랐어? 내가 남자랑……
― 전혀.
― 언제부터 알았어?
― 처음 본 순간.
뭐 이런 진부한 얘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재희에 대해 잘 몰랐고 다만 언제나 짧은 바지를 입고 다니며 수업이 끝나면 누구보다 빨리 건물 밖으로 달려 나가 담배를 피우는 애 정도로만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실은 학과에서 재희의 평판은 최악에 가까웠다.
명실상부 학과의 아웃사이더였던 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어서 단지 평균보다 덩치가 좀 큰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 선배들의 자취방 모임에 초대받고는 했다. 그들의 놀이 코스라는 게 빤해서 대개 당구장이나 피씨방에서 1차를 마친 뒤, 학교 앞의 MSG 전문 식당에 모여 짠 안주에 소주를 들이붓고, 고만고만한 자취방들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편인 선배의 방에 놀러 가 여자 얘기를 하다 코를 골며 잠드는 게 고작이었다. 별것도 없는 스무살, 스물한살짜리 남자들이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면서 얼마나 대단한 섹스를 했는지, 누굴 얼마나 만족시켜줬는지, 학과 여자애들 중 누가 쉬운지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어댔는데, 재희는 그 단골 소재 중 하나였다. 반쯤은 지어낸 게 분명한 그런 얘기를 내가 대학까지 와서 들어야 하나 싶어서, 한번은 취한 채로 “쥐좆만 하게 생긴 것들이 허풍 좀 작작 떨라고” 소리를 지르며 술상을 엎었더니 그 뒤로는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원래 집단의 속성이라는 게 웃겨서 한때 그 집단의 일부였다 튕겨져 나온 사람이 더 맛 좋은 제물이 되기 마련이었다. 새내기 여자애들의 품평에 질린 그들은 이번에는 나를 안줏거리로 삼아 아무리 봐도 게이 같다느니 이태원 어딜 가서 뭘 하고 논다느니, 순진한 스무살짜리들이나 신경 쓸 것 같은 소문을 잘도 떠들어댔고 그 얘기는 반 정도만 맞았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기 마련이었다.) 한학기도 지나지 않아 학과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쯤에야 내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와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과에서 친구 만들기는 글렀구나, 뭐 어때 다들 술도 못 마시고 재미도 없는데, 하고 자조적인 합리화를 하며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할 때쯤 내 인생에 재희라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예기치 않게 재희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나는 그 뒤로 그녀와 시시껄렁한 남자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는데, 실은 재희도 나도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좀 절실한 편이었다.
재희와 나는 정조 관념이 희박하고, 아니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이며 그런 방면에서는 각자의 세계에서 좀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재희는 167에 51, 나는 177에 78이었는데, 둘 다 키가 평균보다 좀 컸다 뿐이지 얼굴이 반반하지도 못했으나 아예 박색은 아니었고, 데리고 다닐 정도는 됐다. (내가 소설로 신인상을 받았을 때 심사평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구절은 ‘객관적인 자기판단 능력’이었다.) 세상은 가난하고 헤픈 스무살의 육체들을 마음껏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별로 어렵지 않게 아무 남자나 만나서 술이나 마시고, 아침이면 둘 중 누군가의 자취방에 모여 부어터진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는 밤새 만난 남자들의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 등산복 만드는 회사에 다닌대. 자지가 작았는데 애무를 잘해서 50점은 주려고.
― 연세대 통계학과 나왔다는데 거짓말 같아. 얼굴도 민짜같이 생겼고 입만 열면 대가리가 텅텅인 게 티 나서 웃겼어.
― 동영상 찍으려고 해서 핸드폰을 집어 던졌어. 자기만 볼 거라는데, 어디서 약을 팔아.
그렇게 실컷 남자들 흉을 보다보면 어느새 눈이 감겼고, 잔뜩 말라붙은 팩을 얼굴에 붙인 채 나란히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주로 아침잠이 적은 내가 먼저 일어났고, 이불을 정수리까지 뒤집어쓴 재희를 내버려둔 채 인스턴트 북어국이나 진라면 같은 걸 끓였으며, 냄새를 맡고 일어난 재희와 함께 신김치에 식은 밥을 말아 먹고는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재희의 방에는 나의 헤어 왁스와 질레트 면도기가, 내 방에는 재희의 아이브로 펜슬과 맥 파우더 팩트가 놓여 있게 되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재희의 펜슬을 들어 눈썹의 빈 곳을 채우거나 팩트의 퍼프를 꺼내 괜히 뺨이나 이마를 세 번쯤 두드려보곤 했는데 재희는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럴 때마다 재희도 나의 면도기로 다리나 겨드랑이 털 같은 걸 밀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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