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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을 일했다.
그에겐 새끼 고양이처럼 연약하고 자그마하던 회사가 지금처럼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데에 비밀스러운 자부심과 동료 의식이 있었다. 그런 것들은 오랜 세월 아무도 모르게 그의 몸 어딘가에 새겨진 것 같았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그는 부장의 호출을 받았다. 한 달 전 새로 온 그 사람은 그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다. 그럼에도 그보다 현명하게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말을 했고 괜찮다 싶을 정도의 예의와 배려를 보였으며 또 어느 순간엔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태도를 취할 줄 알았다.
일찍 오셨네요. 차 한잔하시죠. 커피 괜찮으세요?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던 부장은 그렇게 묻고는 곧장 계산대 쪽으로 걸어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일회용 컵을 들고 무리를 지어 가게를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는 창 너머 도로를 지나는 차들과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제법 가을이라고 할 만한 잘 마른 햇살이 정오의 거리 위에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그는 혼잣말을 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잠에 담긴 커피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부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상대가 하는 말을 경청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에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하고 준비할 만한 시간이 주어진 적이 없었다. 오늘 해야 하는 일은 많았고 그걸 다 해내면 어김없이 하루가 끝났다. 그의 하루라는 건 처음부터 그의 능력과 노력, 수고에 맞게 잘려져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겨우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커피 한 모금을 오래 입안에 머금고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가라앉으면 불에 탄 향이 났고 비로소 쓴맛이 감돌았다. 형편없는 커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은 창밖을 내다보며 이곳도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새 건물이 지어지고 벤처 기업들이 건물을 임대해 사무실을 열고 국가에서 이곳을 벤처 특구로 지정한다는 소문이 2, 3년 전부터 파다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그는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길고 긴 시간이 펼쳐지고 또 펼쳐지기만 했다. 펄럭거리며 자꾸만 펼쳐져서 어디를 짚고 읽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 퇴직금 받으시면 이 근처 어디 오피스텔 하나를 사셔도 좋을 겁니다. 임대 수익이 괜찮다더군요. 저도 회사 관두고 월세나 받으면서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만.
부장은 팔짱을 끼고 몸을 젖힌 채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곤혹스럽고 불편한 기색은 다 감춰지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지요.
그는 부장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조금 웃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커피는 한 모금 정도 남아 있었다.
이번에 가시면 세 번째 교육입니다. 저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처음 저성과자로 분류되고 재교육 대상자가 되었을 때 그는 어쩌면 회사가 이런 방식으로 전체 직원들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교육 대상자가 되고 나서는 모두 한두 번씩 겪는 일이라고 여겼다. 회사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견뎌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세 번째 교육 대상자가 된 것이었다. 그는 이 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세 번째 교육 후에는 최종 평가서가 나온다는 걸 아실 겁니다. 평가 점수에 따라 업무 변경이 있을 수 있고 업무지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아실 테고요.
이런 시기마다 본사에서는 팀원들과 일면식도 없는 부장을 내려보냈다. 지난해 8년간 함께 일했던 부장을 떠나보낸 뒤 그는 벌써 두 번째 부장을 마주하고 있는 거였다. 그래도 이번에 온 사람은 점잖고 예의 바른 편이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무안을 주거나 눈치를 주는 일은 없었다. 개인사를 들먹이며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고 약점을 쥐고 얄팍하게 굴지도 않았다. 부장은 원칙과 법규, 통계와 지표, 수익과 매출 같은 단어를 동원해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했고 성실과 수고, 희생과 감사처럼 긍정적이고 따뜻한 단어들로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필요하다면 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도 있었다.
몇 달 전 변두리에 다세대 건물을 매입했다는 이야기였다. 네 가구가 세 들어 사는 4층 건물이었고, 그는 은행에서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받고, 네 가구의 임대를 떠안는 조건으로 그 건물을 샀다. 그럼에도 아직 그 건물의 등기권리증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상태였다.
5년 뒤, 10년 뒤.
고등학생인 아들 준오가 대학을 졸업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한적한 시골로 이사한 뒤, 그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느긋하게 생활하는 꿈이 그에겐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대출금 이자와 원금을 성실히 갚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매달 빠져나가는 자동차 할부금과 연금, 보험료와 공과금, 준오의 학비와 들쭉날쭉한 경조사비, 팔순이 넘은 양가 부모님의 병원비까지. 지출은 점점 늘고 계속 늘기만 했다. 말하자면 그는 누구나 겪는 경제적 어려움을 들먹이며 사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건 다만 그가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부장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선을 그었다.
한 사람이 버티면 결국 다른 한 사람이 나가야 합니다. 말은 안 해도 다들 연장자가 자진해서 나가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게 가장 보기도 좋고요. 아시다시피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조건이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동료들의 개인사라면 부장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불행하고 힘겨운 순서로 줄을 세우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장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침묵은 점점 길어졌고 두 사람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고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다음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 마음을 정하시면 이 달 안으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빠르면 더 좋고요.
부장은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부장이 카페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뒤에야 그는 주의를 기울여 서류 세 장의 귀퉁이를 잘 맞춘 다음 반듯하게 접었다.
그것을 셔츠 안쪽 주머니에 넣고 나자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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