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의 식탁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 세미나를 한다고 했다. 세미나 주제가 뭐냐고 물으니 성경에 나오는 음식이란다. 성경과 음식?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자 “성경에 먹는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하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생각해보니, 성경을 잘 몰라도 누구나 선악과나 최후의 만찬 정도는 막연히 떠올릴 수 있다. 예수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 기적도 유명하다. 뒤늦게 《맛있는 성경 이야기》라는 흥미로운 책도 알게 되었다. 음식을 중심으로 성경을 볼 수 있듯이, 문학 작품도 요리를 중심으로 읽으면 그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먹기를 멈출 수는 없으니까.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에는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많고, 음식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당시 영국의 차와 요리는 물론 상차림, 아침 식사의 변천 등을 알 수 있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맛을 느끼기 위해 먹기도 하지만, 인간의 ‘먹는 행위’에는 그 외의 많은 문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종교적·정치적·지리적 환경에 따라 형성된 규칙과 관습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도 음식에 대한 규율이 있다. 〈레위기〉 11장은 육지와 수중에 사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세세히 구별하고, 식물과 물도 무엇이 부정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슬람 문화권에는 ‘할랄’이라는 도축 방식이 있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네발짐승은 부정한 짐승이라 하여 먹지 않는다.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밥상에도 ‘법도’가 있어서 해마다 명절이면 성차별을 관습화하고 있다.
식탁은 때로 배움의 장소다. 예수의 식탁에도,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식탁에도 제자들이 붐볐다. 그들은 식탁에서 스승의 ‘말씀’을 들었다. (그 음식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화든 종교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흔히 ‘말씀’에는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금지한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이었다. 이브는 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고, 아담에게 권했다. ‘먹지 않음’으로 순종해야 했는데, 이브는 이를 어긴 셈이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삼칠일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는 극도의 고통을 감내해 사람이 되었다. 이브가 먹지 말 것을 먹어서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면, 웅녀는 먹어야 할 것을 먹어서 사람이 된다. 고통을 인내하고 명령에 복종한 결과 ‘사람’이 될 수 있었고, 그 사람은 ‘여성’의 모습이다. 한국 여성의 근원이 인내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은 해석하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호랑이가 인내심이 없어 포기했다기보다 이 규율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호랑이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를 거부했을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지키는 ‘먹기’가 있다면, 폭력적 지배를 위한 ‘먹기’도 있다. 남성들은 여성과의 성‘관계’를 은어로 ‘먹다’라고 한다. 어떤 남성들은 여성을 ‘먹기’ 위해 일며어 ‘강간 약물’을 여성에게 먹인다. 여기에 ‘관계’는 없다. ‘먹다’, ‘따먹다’라는 표현은 여성을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정의한다. 반면 ‘먹는 여자’는 어떻게 소비되는가. 2016년 방영된 JTBC 예능 프로그램 〈잘 먹는 소녀들〉은 예쁘고 어린 먹는 여자에 대한 포르노적 소비였다. 여성은 먹히거나, 보여지기 위해 먹는다.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다. 밥상 뒤엎는 사람, 밥숟가락을 먼저 들 수 있는 사람, 식사 중에도 계속 움직이며 시중드는 사람, 직사각형 식탁의 가장 ‘윗자리’에 앉는 사람, 준비된 음식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사람, 제사상의 도리를 입으로만 따지는 사람, 성별에 따라 먹는 입과 노동하는 손의 역할을 구별하기 등 식탁에는 권력이 오간다. 요즘은 ‘혼자 밥 먹는 남자들’에 대한 사회적 연민이 증가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시장에서 어묵을 물고 식상한 메시지를 보낸다.
정유미와 예수정이 출연한 〈그녀들의 방〉.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커다란 집에 혼자 사는 석회예수정는 집을 비울 때 식탁 위에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문도 잠그지 않는다. 언젠가 집에 쓰러져 있을 때 “배가 고파 담을 넘은 어느 부랑자” 덕분에 살았다고 했다. 그 후 석희는 항상 그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침입을 허가받은 부랑자는 그의 집에 들어와 밥을 먹고 떠난다.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면 무섭지 않느냐는 언주정유미의 물음에 석희는 “나의 죽음이 방치된다는 것은 공포지요” 하고 답한다. 나의 죽음이 홀로 방치되기를 원치 않으니, 잘 차린 한 끼 식사를 내 집에서 낯선 부랑자에게 얼마든지 제공할 수 있다는 그의 태도를 잊을 수 없다. 물론 영화니까.
식탁은 배고픔을 해소하는 장소이며 타인과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누구나 들어보았을 인사, 또 적어도 한두 번은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넨 적이 있을 것이다.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듣고 아직도 못 먹은 사이도 있다. 처음에는 진짜 먹자는 줄 알았는데, 차차 ‘그냥 인사’인 줄 알게 되었다. 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인연은 참 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와 그 자리를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식탁을 지배하려는 사람과 밥을 먹는 일은 진짜 고역이다. 함께 밥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나눠 먹으며 서로가 연결되는 시간이다. 편하지 않은 사람과는 도무지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또한 먹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나와 죽은 타자의 만남이다. 다른 대상을 죽이지 않고 나를 먹일 수 없다. 필연적으로 시체와 만난다.
외국에 살면서도 설에는 사람들을 몇 명 초대하거나, 때론 내가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곤 했다. 만두를 빚고, 생선전과 파전을 부치고, 갖가지 예쁜 전채 요리에 어울릴 칵테일과 뱅쇼를 만들어 먹으며 즐긴다. 좋은 대화를 위한 훌륭한 식사의 중요성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도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고, 앞으로 백만 년이나 지나면 모를까 각각의 칸막이 속에 격리 수용된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저녁 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페미니즘은 관계의 학문이다. 살아가면서 점점 다짐하게 되는 삶의 태도는 ‘남의 입에 밥 넣기를 주저하지 말고, 내 입으로 죄 짓지 말자’이다.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우리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섞으며 연결된다.
제목에 ‘식탁’이 들어가지만 맛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요리 실력이 별 볼 일 없고, 음식에 관해 특별한 지식도 없으며, 맛에 대한 수사를 과시할 능력도 딱히 없다. 요리 잡지나 관련 책을 즐겨 보지만, 조리법은 대충 넘긴다. 주로 언제 누구와 먹으면 좋을지 상상하면서 음식을 눈으로 먹는다. 무엇을, 어떻게, 왜, 누가, 어디에서, 언제 먹었는지에 대해, ‘먹기’를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 누군가가 해준 음식, 혹은 누군가와 함께 먹은 음식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음식 맛 때문은 아니다. 결국은 사람을 기억한다. 때로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음식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먹어서 내 몸에 쌓인 기억들, 혹은 역사 속에서, 예술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만난 먹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예수도 루터도 아닌 내 식탁에서 뭐 그리 근사한 ‘말씀’이 오가겠느냐만, 화려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은, 때로 친환경적이거나 ‘웰빙’과도 거리가 먼, 때로는 분노와 위로가 오가는 ‘먹는 사람’의 이야기를 적어간다. 이제 여러분을 나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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