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책방의 즐거움
몇 시간이든 머물 수 있는 공간
워낙 무슨 일이든 곧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지만, 이따금 떠올리곤 한 덕분인지 책방에 대한 기억은 그나마 남아 있는 편이다. 한 사람의 손님으로서 느끼는 책방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개인의 기억부터 더듬어보고 싶다. 책방에 대한 최초의 기억. 내게는 사이타마현 우라와시현재의 사이타마시에 살던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최초로, 책방 두 군데가 떠오른다.
당시 살던 아파트에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17번 국도 건너편의 세이유 슈퍼마켓 앞에 있었던 작은 신간 서점이 첫 번째 책방이다. 아쉽게도 이름은 잊어버렸다. 서점 바깥에는 잡지 가판대가 늘어서 있었다. 쇼가쿠칸 출판사의 학습지 로고가 새겨진 전용 가판대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과 중앙에 높다란 서가가 두 열쯤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에 서서 ‘게이분샤 출판사 대백과’ 시리즈를 읽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월간 코로코로 코믹》부터 《주간 소년 점프》까지 분명히 그 서점에서 샀다. 점원이 아저씨였나, 아주머니였나.
궁금한 나머지 스트리트 뷰구글이 제공하는 3차원 지도 서비스로, 실사 촬영한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옮긴 이로 찾아보니, 대충 장소는 특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책방은 없었다. 당시의 그 길가에 어림짐작할 만한 건물이 두 군데 있기는 했으나, 미용실과 동전 세탁소 중 어느 쪽이 서점의 터였는지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자주 다니기는 했다.
또 다른 책방은, 가끔 부모님을 따라서 가곤 했던 우라와역 앞의 코루소라는 건물 안에 위치한 ‘스하라야 코루소 점’이다. 2018년 현재 이 서점은 건재하다. 스하라야는 창업 140년의 역사를 지닌 서점으로, 특히 출판업계에서는 서점 후계자 2세를 양성하는 ‘스하라야 연구소’를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래의 예처럼 현역 서점 경영자의 이야기에서도 스하라야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한다.
교분도 서점은 쇼와 2년1927년에 창업한 노포로, 다나카는 3대째 내려오는 경영자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사이타마 현에 있는 대형 서점 스하라야에서 2년 동안 업무를 배운 뒤 교분도 서점의 경영자가 되었다.
_ 사노 신이치 지음, 《누가 책을 죽이는가》시아출판사, 2002
1975년부터 2006년까지 모두 졸업생 177명을 배출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내게 스하라야는 그저 ‘커다란 서점’일 뿐이었다.
다른 가게에서 쇼핑을 하는 동안 부모님은 으레 나를 책방에 데려다놓았다. 그럴 때면 책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는데, 당시 어려워 보이는 제목의 책등을 바라보며 세상에 이토록 많은 책이 있다는 사실에 압도당하던 감각은 지금도 고스란하다. 질린 적은 없었다. 되도록 부모님이 좀 더 오래 쇼핑하길 바랐다. 돌이켜 보니 이 무렵부터 책방에서라면 몇 시간이든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책방의 터무니없는 구조
책방에 몇 시간씩 머물러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이 재미있어서라고 단정 지으면 그뿐이지만, 거기에는 책방에 오는 손님이 책이라는 물체의 구조를 이해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전제가 책방이라는 터무니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한 권 한 권, 각각의 책에는 저자가 몇 년에 걸쳐 몰두해온 무언가가 종이에 인쇄되고 엮여 페이지라는 형태로 담긴다. 누군가의 인생관조차 바뀌게 하는 이야기, 몇 년이나 한 대상에 집중하여 얻은 지식과 정보, 몇십 년 동안 한 가지 테마를 추구해온 연구자가 도달한 성과 등이 담겨 있다. 언제든 책장을 펼치면 이를 재생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매력이 책등의 문자 배열과 표지 비주얼, 모든 제작 과정에 한데 묶여 응축되어 있다. 그 사실을 책방 손님 모두가 알고 있다.
책등과 표지는 각각의 책에 담긴 방대한 무언가를 명백히 드러내는 역할을 맡았다. 서재는 이러한 책등을 가장 효율 좋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세우기 위해 설계된 가구이다. 한편, 주로 표지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도록 사용하는 가구를 평대라고 부른다. 서가와 평대라는 두 가구를 보다 효율 좋게 배치하기 위해 설계된 곳이 바로 책방이라는 공간이다.
낱장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와 지식, 정보가 책등과 표지에 응축된 책을 각각 최소의 구조물로 취급하며, 서가와 평대를 지지대 삼아 가장 효율적으로 쌓아두었다. 그러한 책의 구조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면, 아이일지라도 그 터무니없는 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 결코 이 책들은 평생이 걸려도 전부 읽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어지간히 자그마한 책방일지라도 책 한 권 한 권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모두 파악하는 것은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애초에 책방은 원리적으로 터무니없이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질리는 법이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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