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딸인 니콜이 아직 젖먹이였을 무렵, 앞으로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읽거나 쓰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음성 인식이나 합성 기술의 발달로 인해 머지않아 그런 능력이 불필요해지리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그런 발상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우리 딸에게만은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 기반을 단단히 다지게 하자고 다짐했다.
그 글을 썼던 이와 우리 부부 모두,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니콜은 이제 성인이 됐고 나 못지않게 글을 잘 읽는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글쓰기 능력을 잃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예측했던 방식과 달리, 니콜은 메시지를 구술하고 가상 비서에게 자기가 방금 한 말을 읽어달라고 명하지 않는다. 대신,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서 하위발성subvocalize 한다. 그러면 망막 프로젝터가 시야에 해당 문장을 보여주고, 니콜은 몸짓과 안구 움직임의 조합을 이용해 그 문장을 수정한다. 실질적으로는 직접 글을 쓰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런 보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종류의 키보드를 건넨다면, 니콜은 지금 이 문장에 포함된 많은 단어들의 철자를 제대로 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특수 상황에서 니콜의 모국어인 영어는 제2언어와 비슷해진다. 말은 유창하게 할 수 있지만 글은 간신히 쓰는 외국어라고나 할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마치 니콜의 지적 성취에 대해 실망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니콜은 영리한 아이이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을 마다하고 미술관에 취직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나는 그애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기 딸이 글자 쓰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오싹해하는 과거의 내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앞서 언급한 그 글을 읽은 것은 삽십여 년 전의 일이며, 그동안 우리 가족의 삶은 예기치 못한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니콜의 엄마인 앤절라가 자기는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현재의 삶보다 더 나은 인생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간 사건이었다. 그 후 십 년 동안 앤절라는 우리 부녀를 내버려두고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니콜이 지금 같은 읽기 쓰기 능력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한 변화들은 그보다는 평범하고 점진적이었다. 사용자의 실용성과 편의성을 보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실제 제공해주는 일련의 소프트웨어 도구들이 야기한 변화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도입됐을 때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암울한 미래를 예언하는 버릇이 없었다는 뜻이다. 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입될 때마다 누구 못지않게 환영했다. 그러나 웻스톤 사가 신종 검색 툴인 리멤Remem을 선보였을 때만은 예전 모델들 때와는 달리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몇천만 명 ― 일부는 내 또래지만 대부분 나보다 어린 ― 이나 되는 사용자들이 몸에 장착한 개인 카메라로 자기 삶 전체를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라이프로그를 유지해왔다. 사람들은 과거의 즐거웠던 순간을 다시 체험하거나 알레르기 반응의 원인을 추적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이유로 라이프로그를 검색하지만, 그것은 이따금일 뿐이다. 검색어를 설정하고 그 결과를 추려내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라이프로그는 완벽에 가까운 앨범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다수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냥 묻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서, 웻스톤 사가 이 모든 것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제품인 리멤의 알고리즘은 당신이 ‘바늘’ 하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묻혀 있는 건초 더미 전체를 검색해준다.
리멤은 당신이 하는 말을 모니터하고 있다가, 과거의 사건들은 언급하면 시야의 좌측 하단에 해당 사건의 영상을 띄운다. 만약 당신이 “결혼식에서 콩가 췄던 거 기억 나?”라고 말하면 해당 영상을 불러오고, 당신과 대화 중인 사람이 “지난번 해변에 같이 갔을 때”라고 말하면 그 영상을 불러온다. 대화를 할 때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리멤은 당신의 하위발성까지 모니터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내가 처음으로 갔던 사천요리 식당”이라는 글귀를 읽는다면 당신의 성대는 마치 당신이 소리 내어 읽는 것처럼 움직이고, 리멤은 그것에 입각해 관련 영상을 불러낸다.
“열쇠 뭉치를 어디 뒀더라?”라는 질문에 실제로 대답해주는 소프트웨어의 효용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웻스톤은 리멤이 편리한 가상 조수 이상의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 기억을 대체해줄 도구라고 말이다.
*
한 유럽인이 그 마을에 살기 위해 나타난 것은 지징기가 열세 살 되던 해 여름이었다. 먼지 섞인 하르마탄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던 때, 인근의 일족들이 족장으로 받드는 마을의 장로 사베가 그 사실을 공표했다.
마을 사람들이 보인 첫 반응은 물론 불안감이었다. “우리가 뭐 잘못한 일이라고 있습니까?” 지징기의 아버지가 사베에게 물었다.
유럽인들은 오래전 처음으로 티브랜드에 왔다. 몇몇 장로들은 언젠가는 그들도 떠날 것이며 삶은 다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올 때까진 그들과 협조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티브족의 생활방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유럽인들이 산다는 것을 의미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유럽인들은 대개 자기들이 건설한 도로에 대한 세금을 걷기 위해서만 마을에 왔다. 어떤 씨족들은 세금 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의 방문을 더 자주 받곤 했다. 그러나 샹게브 씨족은 아니었다. 사베를 우시한 씨족의 장로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전략이라는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사베는 마을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자는 선교사라서, 하는 일이라곤 기도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벌을 내릴 권한도 없다. 하지만 따뜻하게 환영해준다면 관리들이 흡족해할 것이다.”
사베는 선교사를 위해 오두막 두 채를 지으라고 명했다. 취침용 오두막과 손님용 오두막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마을 사람 모두가 팥수수 수확을 잠시 멈추고 모여들어 벽돌을 쌓거나 기둥을 박거나 지붕 이는 일을 도왔다.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오두막의 흙바닥을 발로 다지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큼지막한 상자들을 이고 카사바 경작지 사이를 누비며 다가오는 짐꾼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장 나중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선교사는 든 것도 없는 맨손이었는데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선교사는 모스비라고 이름을 밝히고 오두막을 지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직접 마무리를 돕겠다고 나섰는데, 그런 일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곧 판명됐다. 결국 모스비는 구주콩나무 그늘에 앉아 천 조각으로 머리를 닦으며 기다렸다.
지징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선교사를 바라보았다. 선교사는 상자 하나를 열고 언뜻 나무 블록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반으로 쪼개듯 펼치자 지징기는 그것이 하나로 단단히 엮어놓은 종이 뭉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종이라면, 유럽인들이 마을에 와 세금을 걷을 때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세금을 냈다는 증거라며 종이를 주고 갔다. 그러나 지금 선교사가 들여다보고 있는 종이는 분명 그것과는 다른, 전혀 다른 목적이 있는 종이임이 분명했다.
선교사는 지징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난 모스비라고 해. 네 이름은 뭐지?”
“나는 지징기이고, 아버지는 샹게브 씨족의 오르가입니다.”
모스비는 종이 뭉치를 펼치더니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 “아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가 물었다. “아담은 첫 번째 인간이었단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자식이지.”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샹게브의 후손인데요.” 지징기가 말했다. “티브랜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티브의 후손이고요.”
“그렇구나. 하지만 네 선조인 티브는 내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이었단다. 우리 모두는 형제인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선교사는 마치 입에 비해 혀가 너무 큰 사람처럼 말을 했지만, 지징기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알아요.”
모스비는 미소 짓고 종이를 가리켰다. “이 종이가 아담 이야기를 해준단다.”
“종이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요?”
“이건 우리 유럽인들의 기술인데, 사람이 하는 말을 종이에 표시해 놓은 거야. 다른 사람이 나중에 그 종이를 보아도, 이 표시들을 보면 처음 말한 사람이 무슨 소리를 냈는지 알 수 있지. 그런 식으로 다음에 이걸 보는 사람도 처음 사람이 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야.”
지징기는 야외 생활의 달인인 그베그바에 관해 아버지가 했던 얘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너나 내 눈에는 흐트러진 풀로밖에 안 보여도, 그게그바는 바로 그 지점에서 표범이 들쥐를 죽여 물고 갔다는 걸 금세 알아차리지.” 노인이 그베그바는 지면을 보고, 그가 그곳에 없었을 때 일어난 일들까지 알아맞혔다. 이 유럽인들의 기술이라는 것도 그런 것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표시를 해석하는 데 능숙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 귀로 직접 듣지 않았더라도 그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종이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징기가 말했다.
모스비는 뱀에게 속아넘어간 아담과 그의 아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다음 지징기에게 물었다. “어때?”
“이야기는 재밌게 못하시는데,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어요.”
모스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말이 옳아. 난 아직 티브 말을 잘 못해서, 하지만 이건 좋은 이야기가 맞아. 우리가 아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네 선조인 티브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이란다.”
지징기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종이가 그렇게 오래됐을 리가 없잖아요.”
“맞아. 이 종이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 하지만 이 종이 위의 표시는 그보다 오래된 종이에 있던 걸 옮긴 거야. 그것들도 그보다 더 오래된 것에서 옮긴 거고. 그렇게 수없이 여러 번 옮겨 적은 거란다.”
엄청난 얘기였다. 사실이라면 말이다. 지징기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들은 오래된 이야기인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데요?”
“아주 많이 들어 있지.” 모스비는 종이 뭉치를 휙휙 넘겼다. 한 장 한 장에 표시들이 빼곡한 것이 보였다. 정말 많은 이야기가 든 게 틀림 없었다.
“종이에 있는 표시들을 해석하는 그 기술 말이에요. 유럽인들만 쓸 수 있는 건가요?”
“아니. 너도 나한테 배울 수 있어. 그러고 싶어?”
지징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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